하린은 서둘러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서울 도심의 한적한 공원이었다. 이미 경찰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정하린 프로파일러님."
이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민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하린이 물었다.
민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두 사람은 공원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작은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호숫가에 하얀 천으로 덮인 시체가 놓여 있었다.
"피해자는 누구입니까?"
하린이 물었다.
"김지은, 29세입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공원을 산책하던 시민이 발견했습니다."
하린은 천천히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을 들어 올렸다.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목에는 선명한 졸린 자국이 있었다. 하린은 피해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
하린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민준이 하린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박소연의 친구예요. 사진에서 봤어요."
민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합니까?"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틀림없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 살인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살인범이 박소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저는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린이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호숫가를 걸으며 주변을 관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민준이 다가왔다. 하린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나무 막대기로 그려진 표식이 있었다. 둥근 원 안의 십자가.
"또 그 표식이군요."
민준이 탄식하며 말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표식을 만졌다.
그 순간,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덮쳤다. 분노, 슬픔, 그리고···. 후회.
"형사님,"
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요."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살인범의 감정이···. 변하고 있어요. 여전히 분노가 있지만, 이번엔 후회의 감정도 느껴져요."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살인범이 본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그의 분노는 여전히 강력해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때 한 형사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형사님, 피해자의 소지품에서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작은 봉투를 건넸다. 민준이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그것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여러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중에는 박소연과 방금 살해된 김지은의 모습도 보였다.
"이건···."
하린이 중얼거렸다.
"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인 것 같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하린은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사진 뒷면의 글씨에 고정되었다.
"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사진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의 약속을 잊지 마. - 소연"
하린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단서예요."
민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 '약속'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합니다."
하린은 다시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김지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겪은 공포와 고통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잡을 테니까요."
그때 하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김지은의 손에 무언가가 꼭 쥐어져 있었다.
"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민준이 다가와 시체의 손을 살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펴자, 찢어진 메모지가 보였다.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이제 끝내야 해."
하린과 민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메시지는 살인범이 남긴 것일까, 아니면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쓴 것일까?
"이건 살인범의 글씨체와는 달라요,"
하린이 말했다.
"아마도 김지은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 같아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김지은 씨는 살인범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하린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 메시지로 봐서는, 김지은 씨도 뭔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요."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서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박소연의 부모님께 연락해서 김지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현장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민준이 입을 열었다.
"정하린 씨,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요?"
하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살인범의 감정이 변하고 있어요. 그가 무언가 큰 결심을 한 것 같아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서둘러야겠군요."
경찰서로 돌아온 하린은 윤지우를 찾았다.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또 살인이 일어났다고?"
지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이번엔 박소연의 친구였어."
지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살인범이 박소연과 관련된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는 거네?"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어. 살인범의 감정이 변하고 있어."
지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떻게?"
하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의 감정이 느껴졌어. 마치···. 본인의 행동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어."
"그게 좋은 소식일까, 아니면 나쁜 소식일까?"
지우가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는 서둘러야만 해."
그때 하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강태우 검사였다.
"네, 검사님."
"정하린 씨, 큰일 났습니다."
강태우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박지훈이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하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뭡니까?"
"그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하린은 숨을 들이켰다.
"어느 병원입니까?"
강태우가 병원 이름을 알려주었다. 하린은 즉시 지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경찰들이 와있었다. 하린은 서둘러 중환자실로 향했다.
"지금 환자 상태가 어떻습니까?"
하린이 담당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매우 위중합니다.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예요. 지금 응급 수술 중입니다."
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찾던 살인범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그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혹시 그가 무언가 남긴 것이 있나요?"
하린이 다시 물었다.
이때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왔다.
"네, 이것을 손에 꼭 쥐고 있었어요."
그녀는 작은 봉투를 건넸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회중시계와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하린은 천천히 쪽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떨리는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소연아, 미안해. 우리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이제 모든 걸 끝내려고 해. 이 오빠를 용서해 줘."
하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박지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깊은 후회와 슬픔, 그리고 절망···.
"정하린 씨."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린은 고개를 돌렸다. 이민준이 서 있었다.
"박지훈을 체포하러 왔습니다만···."
주변 분위기를 파악한 민준의 목소리가 조금 흐려졌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지금은 생명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해요.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건 나중 일입니다."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 씨 말이 맞습니다. 일단 그의 회복을 기다려야겠군요."
하린은 다시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계를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강렬한 감정의 물결이 그녀를 덮쳤다.
슬픔, 후회, 그리고 깊은 사랑.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하린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건···."
하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이 시계···. 박지훈의 모든 게 담겨있어요. 그의 슬픔, 후회,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까지···."
민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 안타깝네요."
그때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하린과 민준은 즉시 그에게 다가갔다.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민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어요. 앞으로 24시간이 고비가 될 겁니다."
하린과 민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24시간···. 그 시간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하린 씨,"
민준이 말했다.
"우리는 이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합니다. 박지훈과 박소연,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에 관해 더 자세히 조사 해 봐야 해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박소연의 부모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이번엔 제가···. 제 능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고 싶습니다."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여전히 하린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은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민준이 마침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은 병원을 나와 박소연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이미 밤이 깊었지만, 소연의 부모님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박소연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린은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박지훈의 자살 시도와 그가 남긴 메시지에 대해.
"오, 하느님···,"
소연의 어머니가 흐느끼며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지훈이···."
하린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머님, 제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따님의 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라와 주세요."
소연의 아버지가 말했다.
네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소연의 방 앞에 서자 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이 방에 들어가서 집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어도 될까요?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요."
부부는 잠시 망설이다가 동의했다. 민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고요함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모든 감각을 열어 방안에 남아있는 감정들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희미한 감정들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슬픔,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
하린은 천천히 방 안을 걸어 다녔다. 그녀의 손가락이 책상, 침대, 벽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덮쳤다.
"아···."
하린이 작게 신음했다.
그녀는 벽장 앞에 서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벽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신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린은 천천히 그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여러 장의 편지와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하린은 천천히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왔다. 박소연과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한 남자.
하린의 눈이 커졌다. 그 남자는 박지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녀는 사진 뒷면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름. 영원히 잊지 않을게. - 현우"
하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현우···. 이 사람은 누구지?
그녀는 서둘러 다른 편지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깊숙이 숨겨져 있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소연아, 우리가 한 일은 잘못됐어.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네 오빠가 알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제발 비밀로 해줘. - 지은"
하린은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걸까?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준과 소연의 부모님은 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민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중요한 것을 발견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건 좋지 않은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소연 씨의 죽음···. 그리고 이 모든 살인 사건들. 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민준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린은 자신이 발견한 편지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사진 속의 남자, 현우라는 사람···. 그리고 이 편지 내용. 이들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이 박소연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소연의 부모님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소연이가?"
소연의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우'라는 사람을 찾아야 해요.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수사에 착수하겠습니다."
하린은 다시 한번 방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녀는 이 사건의 본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미스터리가 자신 앞에 펼쳐지고 있을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박지훈···,"
하린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정말로 알고 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현우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하지만 하린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진짜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