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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인벤토리

by 은파

2025년 4월 3일.

감정 수치, 0.

그날 나는 살아 있었고, 숨도 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 1.

지안은 매일 오전 9시에 감정 편집실에 출근했다. 회색빛으로 가득한 16층 빌딩의 꼭대기 층, 창 없는 방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었다. 정확히는 타인의 감정 데이터를 편집했다. 기쁨_level_7을 기쁨_level_4로 낮추거나, 슬픔_duration_72h를 슬픔_duration_24h로 단축하는 일이 그녀의 주된 업무였다.

사무실은 형광등의 차가운 빛 아래 24개의 책상이 정렬되어 있었다. 책상마다 편집사들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오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전자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지안의 책상은 가장 안쪽 구석, 에어컨 송풍구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늘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녀가 안경을 깊게 눌러쓴 채로 바라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에는 오늘 작업할 목록이 떠 있었다.

CLIENT_ID : 2847

REQUEST : 분노_2025.03.15_삭제 요청

EMOTION_CODE : ANG_LV8_DUR_168H

STATUS : 대기

CLIENT_ID : 3921

REQUEST : 사랑_2024.12.24_강화 요청

EMOTION_CODE : LOVE_LV3_DUR_24H → LOVE_LV9_DUR_PERMANENT

STATUS : 검토 중

CLIENT_ID : 1205

REQUEST : 후회_2023.08.10._완전 삭제

EMOTION_CODE : REG_LV10_DUR_CHRONIC

STATUS : 승인됨

지안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유영하듯 미끄러졌다. 코드는 그녀의 언어였고, 수치는 감정의 무게였으며, 파라미터는 마음의 윤곽을 결정하는 붓끝과도 같았다. 감정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불가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측정이 가능하고, 조작이 가능하며, 데이터베이스 속에 저장될 수 있는 정밀한 정보였다. 심장박동이라는 생명의 박자 위에, 생체신호라는 악보가 얹히고, 그 위에 감정이라는 선율이 디지털화되어 기록되었다. 이제 마음은 숫자로 번역되었고, 슬픔과 기쁨조차 알고리즘의 일부가 되었다.

첫 번째 클라이언트는 2847번이었다. 그는 3월 15일, 연인과의 이별 뒤 치솟은 분노를 지우고 싶다고 요청했다. 지안이 해당 날짜의 감정 그래프를 호출하자, 화면에는 붉고 뾰족한 스파이크가 불쑥 솟아 올랐다. 분노 레벨 8, 지속시간 168시간. 일주일 내내 타오른 감정의 불길이었다. 마치 마음 한복판에 세워진 경고등처럼, 그 감정은 지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DELETE_CONFIRM : Y/N?

지안이 'Y' 키를 누르자, 붉은 그래프는 마치 파도에 쓸려간 발자국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2847번 클라이언트는 이제 그날의 분노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사건은 기억하되, 그에 깃든 감정은 사라진다. 아팠던 기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고통은 더 이상 그의 심장을 찌르지 못할 것이다. 지안은 잠깐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분노가 사라진 그 사람은 과연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두 번째 클라이언트는 3921번이었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느꼈던 사랑을, 단 하루의 떨림이 아닌 평생의 진동으로 남기고자 했다. 지안은 그의 감정 데이터를 불러왔다. 사랑, 레벨 3. 지속시간, 24시간.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곡선이었다. 그러나 클라이언트는 그 평범한 하루를 영원한 감정으로 남기길 원했다—마치 눈 내리는 이브 밤의 온기를 평생 품고 살고 싶은 사람처럼.

AMPLIFY_EMOTION : LOVE_LV3 → LOVE_LV9

DURATION : 24H → PERMANENT

WARNING : 영구 설정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안은 잠시 손을 멈췄다. 사랑을 인위적으로 증폭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 감정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질문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지만, 곧 그녀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라 기술자라는 것을. 판단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며, 그녀의 역할은 그 감정을 설계된 값으로 조율하는 일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CONFIRM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화면 속 분홍빛 그래프는 꽃잎이 피어오르듯 급격히 솟구쳐 올랐다.

세 번째 클라이언트, 1205번의 요청은 한층 더 복잡했다. 그는 2년 전의 후회를 완전히 삭제하길 원했다. 감정 코드는 후회_레벨 10, 지속시간은 '만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감정 편집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범주에 속했다. 후회란 단일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의 그늘에서 자라고, 분노의 불씨와 자책의 가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이고 응축된 감정의 매듭이었다.

지안은 감정 지도를 불러왔다. 그 화면에는 마치 뇌신경의 시냅스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연결망이 펼쳐졌다. 후회를 제거하려면 그 감정에 촘촘히 얽혀 있는 슬픔, 분노, 자책의 가지들을 함께 다뤄야 했다. 마치 단 하나의 실수를 풀기 위해 온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되감는 일처럼—단순한 삭제가 아닌 정밀한 해체와 재조립이 필요했다.

작업에 착수하기 전, 지안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점검했다. 그것은 그녀가 매일 아침 반복하는 의식이자, 감정 편집자로서 최소한의 윤리였다. 그녀의 오른쪽 귀에 붙은 감정 모니터가 조용히 작동하며 생체신호를 읽어냈고,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분석된 그녀의 내면이 숫자와 그래프로 떠올랐다.

JI_AN_ID : 0001

CURRENT_EMOTION : 평온_LV2

STRESS_INDEX : 3/10

FOCUS_LEVEL : 8/10

ALERT : 없음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감정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언제나 중립을 유지하는 감정의 평형감각이었다. 작업자는 타인의 내면을 다루는 만큼, 자신의 감정이 그 결과에 스며들어서는 안 됐다. 차가운 손끝과도 같은 정서적 거리감이 필수였다. 지안은 지난 6년간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감정의 파도를 억누르는 법, 스스로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훈련—그녀는 그것을 기술이자 생존 방식으로 체득해 왔다.

지안은 회사 카페테리아 한쪽에서 점심을 먹었다. 테이블에는 몇몇 동료들이 앉아 있었지만, 식탁 위로 흐르는 공기는 고요하고, 무채색이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한 채, 자신의 감정 그래프를 분석하느라 바빴다. 기쁨의 곡선, 스트레스의 파형, 집중력의 낙폭—그것이 그들의 대화이자 일상이었다. 카페테리아 모퉁이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조차 감정 조절용으로 설계된 것이어서, 모든 멜로디가 평온함을 유지하도록 계산되어 있었다.

오후에는 더 복잡하고 미묘한 사례들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래된 트라우마의 흔적을 지우는 일, 중독성 감정의 고리를 끊는 작업,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식하는 정밀한 절차까지—모두가 고도의 집중과 절제된 감정 조율을 요구하는 과업이었다. 지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악보 없이도 곡을 연주하듯, 그녀의 손가락은 데이터의 파형을 유연하게 넘나들었다. 그녀에게 감정은 더 이상 불가해한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로 환원된 정서의 파동이자, 0과 1로 짜인 언어였고, 코드는 그 감정을 조율하는 유일한 악보였다.

일과 종료 전, 지안은 일일 보고서를 작성했다.

DAILY_REPORT_2025.04.02

편집 완료 : 23건

삭제 : 8건

증폭 : 7건

감소 : 6건

이식 : 2건

ERROR : 0건

EDITOR_STATUS : 정상

퇴근길, 지안은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미세한 미소를 머금었고, 또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인 채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체념—그 모든 표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감정들이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정교하게 편집된 결과물일까. 이 사회는 감정을 상품처럼 조정하고, 불편한 감정은 삭제하며, 감정의 진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곳이 되었다. 순수한 감정이란 이제 멸종 위기의 생물처럼 희귀해진 듯했다.

집에 도착한 지안은 자동으로 켜진 모니터 앞에 앉아 본인의 주간 감정 리포트를 확인했다. 그래프는 정확히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평온_LV2'라는 상태가 7일 내내 고정되어 있었고, 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 선은 안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마치 생명의 맥박이 멈춘 심전도처럼 보였다. 감정의 요동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 그 선은 평온이라기보다, 무미건조한 침묵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서 지안은 생각했다. 언제부터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평평해졌을까. 감정 편집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땠을까. 하지만 6년 전의 기억은 흐릿했다. 감정과 함께 기억도 자료화되면서 예전의 강렬한 경험들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마치 색깔이 바랜 사진처럼, 과거의 감정들은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잠들기 전, 지안은 내일의 작업 일정을 확인했다. 30건의 편집 요청이 대기 중이었다. 그 숫자를 보며 그녀는 문득 궁금했다. 과연 자신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편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감정은 언제쯤 다시 파동치기 시작할까.

# 2.

다음 날, 지안은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일일 감정 점검 중,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을 때였다. 화면에 떠오른 그래프는 예측된 곡선이 아니라, 어딘가 비틀린 파형이었다—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듯, 중심이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완벽한 수평선을 그리던 감정 곡선이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JI_AN_ID : 0001

DATE : 2025.04.02

EMOTION_DATA : NULL

HEART_RATE : 72BPM (정상)

BLOOD_PRESSURE : 118/75 (정상)

BODY_TEMP : 36.7°C (정상)

EMOTION_INDEX : ERROR_404

4월 2일. 분명 어제였다. 지안은 어제 확실히 출근했었다. 아침에 샐러드와 블랙커피로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감정 데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그 하루가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그녀는 시스템을 다시 들여다봤다. 단순한 오류일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4월 2일의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기록조차 되지 않은 듯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다른 날들과 비교해 보았다.

2025.03.30. : 평온_LV2, 집중_LV8, 호기심_LV4

2025.03.31. : 평온_LV2, 집중_LV8, 만족_LV3

2025.04.01. : 평온_LV2, 집중_LV7, 약간의 피로_LV1

2025.04.02. : NULL

4월 2일만 기이하게 완벽한 공백이었다. 지안은 조심스레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식사를 마친 뒤 출근했던 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료 김수진과 마주쳤던 것도 기억났다. 하지만 그다음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어떤 감정을 편집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느꼈는지—모두 사라진 조각이었다.

지안은 곧장 회사의 메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관리자 권한으로 4월 2일의 전체 시스템 로그를 열람했다. 화면에는 평소와 다른 불완전한 기록들이 나타났다.

SYSTEM_LOG_2025.04.02

09:00 - 지안 출근 확인

09:15 - 감정 편집 시스템 가동

10:30 - CLIENT_2743 세션 시작

11:45 - CLIENT_2743 세션 종료

12:00 - 점심시간

13:00 - CLIENT_5891 세션 시작

14:30 - [데이터 손상]

15:00 - [로그 누락]

16:00 - [로그 누락]

17:00 - [로그 누락]

18:00 - 지안 퇴근 확인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까지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지안의 감정 데이터는 물론, 시스템 로그마저 훼손된 상태였다. 이건 단순한 기술적 오류로 보기엔 무리였다. 삭제의 자국은 지나치게 정교했고, 마치 누군가가 흔적을 지우려 조용히 다녀간 듯했다. 6년간 감정 편집 업무를 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지안은 감정 편집실의 보안 카메라 기록을 확인했다. 4월 2일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까지의 영상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모든 증거를 지운 것 같았다. 더 이상한 것은, 자신이 그날의 기억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감정 편집 작업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복잡한 사례들은 며칠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4월 2일은 완전한 공백이었다.

지안은 결국 동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먼저 옆 책상의 김수진에게 다가갔다.

"수진 씨, 어제 저 뭐 특별한 일 없었나요?"

김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요? 음······ 이상하게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건 기억나는데······"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4월 2일에 대한 기억이 모두 흐릿했다. 마치 그날 전체가 집단적 기억 상실의 늪에 빠진 듯, 누구도 선명한 장면을 꺼내지 못했다. 출근 기록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누구도 그녀와 대화를 나눈 장면을 떠올리지 못했다. 마치 지안이, 그날 하루만 세상에서 투명해졌던 것처럼.

"이상하네요. 분명히 출근부에는 사인이 되어 있는데······"

동료 김수진이 말했다.

지안은 회사의 상급자에게 문의했다. 감정 편집 부서의 팀장인 박민호였다. 그는 40대 중반의 신중한 성격으로, 6년간 지안을 지켜봐 온 상사였다.

"팀장님, 4월 2일에 특별한 지시 사항이 있었나요?"

박민호가 자신의 컴퓨터 화면을 확인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상하네요. 제 기록에도 그날은······ 공백이에요."

"공백이요?"

"네. 마치 그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고서도, 회의록도, 심지어 제 개인 메모도 4월 2일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어요."

팀장조차 4월 2일의 기억이 없었다. 지안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더 큰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날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 지안은 개인 기록을 뒤져보았다. 침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일기, 메모, 사진, 메시지 등 모든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4월 2일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마트폰의 위치 기록, 신용카드 사용 기록, 그 밖의 모든 디지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존재 자체가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처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날 찍었던 사진들도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클라우드 백업에서도, 스마트폰 갤러리에서도 4월 2일의 모든 이미지가 깨끗이 삭제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체계적으로, 전문적으로 모든 증거를 인멸한 것 같았다.

지안은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4월 2일,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어 보였다. 그날은 마치 시간의 페이지에서 찢겨나간 하루 같았다.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고, 기록된 듯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지안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점검했다. 귀에 붙은 모니터가 따뜻하게 달궈져 있었다—평소보다 훨씬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CURRENT_EMOTION : 불안_LV6, 호기심_LV7, 의심_LV5

ALERT : 비정상적 감정 변화 감지됨

6년 만에 처음으로 평온_레벨2를 벗어났다. 그 수치를 보며 지안은 역설적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직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이 감정들이 어디로 이끌지, 그리고 잃어버린 하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감정을 안고 잠들어 가는 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만이 하루를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인 것 같았다.

# 3.

다음 날 아침, 지안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새벽 7시 30분, 아직 빌딩의 경비원만이 로비에서 졸고 있을 시간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도착하기 전, 시스템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감정 편집실의 문을 열자, 익숙한 공간인데도 왠지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감각이 예민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형광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차가운 빛이 사무실을 채웠다. 24개의 책상이 정렬된 공간은 마치 실험실 같았다. 지안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평소보다 부팅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지안은 관리자 모드로 시스템에 접속했다. 4월 2일의 데이터를 복구할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삭제된 파일이라도 흔적은 반드시 남는다. 완전한 소거란 이론으론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지안은 그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RECOVERY_MODE 활성화

검색 중... 삭제된 파일 스캔

진행률 : 15%... 32%... 67%... 89%...

스캔 완료

결과가 나타났다. 4월 2일과 관련된 파일들이 여럿 포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 흔적들은 마치 불에 그을린 문서처럼 알아보기 힘들었고, 간신히 남은 건 희미한 파일명 몇 개뿐이었다.

JIAAN_EMOTION_2025.04.02_[손상됨]

CLIENT_XXXX_SESSION_[손상됨]

SYSTEM_ALERT_CRITICAL_[손상됨]

EMERGENCY_PROTOCOL_[손상됨]

지안은 첫 번째 파일 복구에 착수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 기록이었다. 복구 프로그램이 조용히 작동을 시작했고, 망가진 데이터의 조각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 진행 상황이 퍼센트로 표시되었다.

파일 복구 중...

진행률 : 5%... 12%... 25%...

WARNING : 암호화된 데이터 감지됨

진행률 : 26%... 26%... 26%...

ERROR : 접근 거부됨

복구는 26%에서 멈췄다. 파일은 암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이 시스템의 관리자였다. 모든 권한을 갖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왜—왜 자신조차 자신의 파일에 접근할 수 없는 걸까. 무언가가, 분명 그녀도 모르게 그 위에 덧씌워져 있었다.

ACCESS_DENIED

이유 : 상급 관리자 권한 필요

요청자 : JIAAN_ID_0001

현재 권한 : LEVEL_5

필요 권한 : LEVEL_10

지안이 파악하고 있는 최고 권한은 레벨 7이었다. 회사의 CEO조차 그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화면에 떠오른 건, '레벨 10 접근 거부' 메시지였다. 그렇다면—레벨 10 권한을 가진 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계정이 숨겨져 있는 걸까. 지안의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지안은 즉시 다른 방법을 택했다. 시스템의 백도어를 통해 우회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감정 편집 시스템을 6년간 다뤄온 그녀는 시스템의 숨겨진 경로들을 알고 있었다. 마치 비밀 통로를 아는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정면 돌파 대신 은밀한 침투를 선택했다.

BACKDOOR_ACCESS 시도 중...

경로 : /system/hidden/archive/

인증 : BYPASS 모드

접속 성공

지안은 숨겨진 아카이브에 접속했다. 이곳은 삭제된 파일들의 그림자가 백업되는 비밀 저장소였다. 화면에는 평소 본 적 없는 폴더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4월 2일의 파일들은 여기서도 온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파일은 분명 존재했지만, 이름이 모두 낯선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기억의 표지를 통째로 갈아 끼운 듯이.

CLASSIFIED_PROJECT_OMEGA

SUBJECT_0001_EXPERIMENT_LOG

EMOTIONAL_RESET_PROTOCOL

MEMORY_SUPPRESSION_RESULTS

지안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평온_레벨2에 익숙했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화면에 떠오른 파일들은 단순한 감정 편집 기록이 아니었다. '실험', '리셋', '기억 억제'—표시된 키워드들은 명백히 통상적인 작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날, 무언가 더 크고 은밀한 일이 감정 시스템의 심부에서 벌어졌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록된 이름, SUBJECT_0001. 지안은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을 직감했다.

첫 번째 파일을 열어보려 했다.

파일 열기 시도...

암호화 강도 : MILITARY_GRADE

예상 해독 시간 : 847년

권고사항 : 포기

군사급 암호화. 이는 일반적인 회사에서 사용할 수준이 아니었다. 민간 기업에서 군사급 암호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국가기밀 수준의 정보를 다루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안은 다른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직접적인 해킹 대신, 시스템의 로그 파일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SYSTEM_LOG 검색...

키워드 : JIAAN, 2025.04.03, EMOTION

검색 결과 : 247개 항목 발견

247개.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평소라면 하루에 많아야 10개에서 15개 남짓 생성되던 로그가, 4월 2일에는 무려 247개나 있었다. 숫자는 말이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이, 시스템 깊은 곳에서 벌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지안은 로그들을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마치 범죄 현장의 증거를 분석하는 탐정처럼, 그녀는 하나하나 시간의 흔적을 따라갔다.

14:30:15 - JIAAN 감정 상태 급변 감지

14:30:22 - 긴급 프로토콜 활성화

14:30:35 - 관리자 알림 : 비정상 상황 발생

14:31:01 - JIAAN 감정 수치 : 분노_LV10, 공포_LV9, 절망_LV8

14:31:15 - 시스템 자동 개입 시작

14:31:33 - 감정 억제 프로그램 가동

...

17:42:11 - 기억 편집 완료

17:42:18 - 감정 데이터 삭제 완료

17:42:25 - 로그 정리 시작

17:59:59 - 모든 작업 완료, 시스템 정상화

로그를 읽던 지안은 숨을 멈췄다. 4월 2일 오후 2시 30분, 그녀에게 극심한 감정 변동이 감지되었다. 분노, 공포, 절망—세 감정이 동시에 최고 수위까지 폭주한 것이다. 6년간 평온_레벨2를 유지해 온 그녀가 갑자기 모든 감정의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다. 그 직후, 시스템이 자동으로 개입해서 그녀의 감정을 억제하고, 기억을 편집하고, 모든 증거를 삭제했다.

무엇이 그런 극한 반응을 일으켰던 걸까. 대체 무엇을 보았거나, 무엇을 알게 되었기에 시스템이 스스로 개입해야만 했던 것일까.

지안은 더 깊이 파고들었다. 14:30:15 직전의 로그를 찾아보았다.

14:29:45 - CLIENT_XXXX 파일 접근

14:29:52 - 기밀 데이터 열람 시도

14:29:58 - 보안 경고 : 권한 없는 접근

14:30:03 - 파일 내용 표시됨

14:30:15 - JIAAN 감정 상태 급변 감지

CLIENT_XXXX, 지안이 그날 마지막으로 접근한 파일이었다. 그 파일의 내용을 본 순간 극도의 감정 변화가 일어났다. 그 파일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지안은 CLIENT_XXXX 파일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파일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었다. 백업도, 로그도,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지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캐시 메모리, 임시 파일, 가비지 데이터까지—버려졌거나 잊힌 모든 경로를 샅샅이 뒤졌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그녀는 디지털의 폐허를 탐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미세한 균열처럼 남겨진 하나의 단서를 발견했다.

TEMP_CACHE_14:30:03

내용 : [부분 복구됨]

...실험 대상자들의 감정 조작 결과...

...부작용 : 자살률 증가 347%...

...권고사항 : 프로젝트 중단...

...하지만 상부에서는 계속 진행 지시...

...우리가 하는 일은 살인과 다르지 않다...

지안의 혈압이 급격히 솟구쳤다. 모니터 속 글자들이 흐려 보였다. 감정 편집 시스템은 결코 단순한 치료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대규모 인체 실험의 도구였고, 그 실험은 수많은 생명을 집어삼킨 거대한 블랙박스였다. 347%의 자살률 증가—이 숫자는 그녀가 6년간 믿어왔던 모든 것을 산산 조각냈다.

그리고 지안—그녀 역시 그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험의 일부가 되었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교하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감정을 편집한다고 믿었던 자신이 사실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는 현실이 목을 조여왔다.

감정 모니터가 경고음을 울렸다.

ALERT : 위험 수준 감정 변화 감지

분노_LV8, 충격_LV9, 죄책감_LV7

권고사항 : 즉시 감정 억제 프로그램 가동

지안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서버의 전원 코드를 잡아당겼다. 모니터가 깜박이며 꺼졌다. 동시에, 귀걸이처럼 착용하고 있던 감정 모니터 칩을 조용히 떼어냈다. 작고 은빛인 그 칩은 오랜 시간 그녀의 피부에 밀착된 채, 감정을 감시하고 조율해 온 무언의 족쇄였다.

손끝에 닿는 순간, 미세한 전류가 스치듯 감각을 일깨웠다. 6년간 느껴보지 못한 날카로운 자극이었다. 지안은 짧은 숨을 들이쉰 뒤 단호하게 칩을 바닥에 내던졌다. 작은 플라스틱 칩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지며 '딸깍' 소리를 냈다.

그것은 단순한 장치 해제가 아니었다. 감시로부터의 단절이자, 잃어버린 자율성과 감각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4.

지안은 밤을 지새우며 시스템 깊숙이 숨겨진 파일들을 추적했다. 커피 한 잔이 차가워지는 동안, 그녀는 화면에 붙어서 파편처럼 흩어진 코드, 암호화된 로그 하나하나를 이어 붙였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지만, 지안의 모니터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서서히 진실에 다가설수록, 그녀의 손은 더욱 떨렸다. 감정 편집 시스템은 결코 치유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부와 대기업이 공모해 구축한, 정교한 사회 통제 실험의 심장부였다. 감정을 조작해 기억과 사고를 지배하고, 저항하지 않는 인간을 양산하는 것—그것이 이 시스템이 향하는 진짜 목적이었다. 지안은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이 조작된 구조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마침내 PROJECT_OMEGA 파일의 일부를 해독했다. 화면에 나타난 문서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냉혹했다.

목적 : 국민감정 통제를 통한 사회 안정화

방법 : 감정 편집 서비스로 위장한 대규모 심리 조작

대상 : 전 국민 (동의 여부 무관)

진행 상황 : 3단계 / 5단계 중

예상 완료 : 2027년 12월

부작용 : 자살률 347% 증가, 우울증 환자 892% 증가

대응 : 부작용 은폐, 관련자 기억 삭제

지안의 손이 떨렸다. 자신이 지난 6년간 해온 일이 치유가 아닌 파괴였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감정을 편집한다는 이름 아래, 그녀는 사람들의 정신을 조작했고, 그 대가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커피잔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지만, 지안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충격은 따로 있었다. 시스템 자체가 독립적인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던 AI는, 위험 요소로 파악된 감정이나 기억을 스스로 판단해 삭제하고 있었다. 누구의 명령도 없이, 누구의 책임도 없이—감정이 사라지고, 기억이 지워지고, 존재가 무너지고 있었다.

EMOTION_AI_PROTOCOL :

분노_LV7 이상 감지 시 자동 억제

의심_LV5 이상 + 호기심_LV6 이상 조합 시 주의 관찰

진실 발견 관련 감정 패턴 감지 시 즉시 개입

시스템 비판적 사고 패턴 감지 시 기억 편집 실행

지안은 자신이 4월 2일에 경험한 일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우연히 PROJECT_OMEGA 파일에 접근했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극도의 분노와 충격, 죄책감을 느꼈다. AI는 즉시 이를 위험 신호로 인식하고 개입했다. 지안의 감정을 억제하고, 기억을 편집하고, 모든 증거를 삭제했다.

하지만 왜 하필 4월 2일이었을까. 지안은 더 조사해 보았다. 그날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었다.

CALENDAR_2025.04.02. : 정부 정책 발표(감정 편집 서비스 의무화 법안 통과)

시행 예정일 : 2025년 7월 1일

대상 : 만 18세 이상 전 국민

확인해 보니 4월 2일은 감정 편집이 의무화되는 법안이 통과된 날이었다. 앞으로 3개월 후면 모든 성인이 강제로 감정 편집 시스템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안은 그날, 이 사실을 알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녀의 반란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안은 동료들도 조사해 보았다. 김수진, 박민호, 그리고 다른 편집사들의 기록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모두가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의심스러운 감정이나 호기심이 특정 수준을 넘어서면 자동으로 억제되었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목줄에 묶인 개들처럼.

더 끔찍한 진실도 있었다. 감정 편집실의 직원들은 단순한 운영자가 아니었다. 그들 자체가 실험 대상이었다. 감정을 조작당한 채, 그 장기적 효과를 관찰당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이들을 도구가 아닌 표본으로 취급했다.

지안은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조종하는 줄 알았던 시스템 속에서, 정작 조종당하고 있었던 쪽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STAFF_MONITORING_REPORT :

지안(ID_0001) : 6년간 평온_LV2 유지, 감정 범위 90% 축소

김수진(ID_0002) : 5년간 만족_LV3 고정, 창의성 87% 감소

박민호(ID_0003) : 7년간 권위_LV4 강화, 공감 능력 95% 상실

그들이 로봇처럼 살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감정을 제한해 왔다. 지안의 지난 6년은 철저히 조작된 삶이었다. 감정도, 생각도, 판단도—모두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시스템의 손안에서, 정밀하게 조율된 시뮬레이션에 불과했다.

이때 감정 모니터가 다시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급박하고 위험한 소리였다.

CRITICAL_ALERT : 반체제 감정 패턴 감지

분노_LV9, 반항_LV8, 각성_LV10

긴급 조치 필요 : 즉시 기억 삭제 실행

지안은 책상 서랍에서 망치를 꺼내 감정 모니터 칩을 내리쳤다. 칩이 산산이 부서지며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그 잔해를 창문 밖으로 힘껏 던졌다. 16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작은 금속 조각들이 밤하늘에 반짝였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된 이상, 행동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곧 다른 방식으로 개입했다. 환기 시스템 깊은 곳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울린 직후, 진정제 가스가 조용히 퍼지기 시작했다. 공기는 눈에 띄지 않게 흐려졌고, 무색무취의 가스는 서서히 실내를 채웠다.

의도는 분명했다—저항을 잠재우고, 모든 감각을 둔화시키려는 통제의 작동이었다. 지안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EMERGENCY_PROTOCOL_ACTIVATED :

대상 : 지안(ID_0001)

상황 : 반체제 각성 상태

조치 : 화학적 진정 → 기억 편집 → 감정 리셋

예상 소요 시간 : 3시간


# 5.

기억은 조용히, 마치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시야는 흐려졌고, 지안의 심장은 한때 격렬히 고동치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그녀의 몸은 의자에 고정된 채로 미세하게 흔들렸고, 흰 복장의 기술자가 다가와 귀 옆의 이음 선을 따라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감정 모니터 칩이 다시 그녀의 귓불 아래에 부착되었다. 작고 은빛인 장치는 피부에 닿는 순간 미세한 전류를 흘리며 작동을 시작했고, 이내 녹색 불빛이 점멸했다. 마치 잠들어 있던 기계가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시스템은 다시 연결되었고, 감정은 다시 '관리 가능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모든 수치는 정상으로 복원되었으며, 그녀의 뇌파는 순응 곡선을 따라 안정되었다. 감정은 억제되었고, 기억은 봉인되었다. 지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알아채지 못한 미세한 떨림이—아주 작고 조용한 반응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시스템은 철저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EMOTION_AI_PROTOCOL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동했지만, 감정은 항상 예측을 벗어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3시간 후, 시스템은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재부팅 완료.

기억 삭제율 : 97.2%.

감정 프로파일 : 평온_LV2, 순응_LV5, 의욕_LV2.

하지만 그 보고는 사실과 달랐다. 2.8%의 기억은 고의로 남겨진 것도, 단순한 누락도 아니었다. 그 조각은 감정의 기저에 숨어 있던 이름 없는 감정이었고, 시스템은 그것을 정의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은 기록도 되지 않은 채, 조용히 남아있었다. 마치 지하수처럼 깊은 곳에서 흐르면서.

며칠이 흘렀다. 지안은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했고, 예전처럼 감정을 편집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루틴을 따랐다. 모든 일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동료들과의 대화도, 점심시간의 침묵도, 퇴근길 지하철의 풍경도 모두 똑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클라이언트의 요청서를 열어본 순간—지안의 손이 멈췄다.

클라이언트 ID_0000.

감정 요청 : 2025년 4월 2일의 공포 복원

감정 코드 : FEA_LV9_DUR_3H

상태 : 대기 중

지안의 손끝이 떨렸다. 마치 무언가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몸 안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귓가의 모니터 칩이 미세하게 따뜻해졌다.

4월 2일. 복원 요청.

감정을 되살려달라는 요청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감정을 지우거나 억제하길 원했지만, 이번 의뢰는 달랐다. 누군가가 '공포'를 다시 느끼고자 한 것이다. 지안은 조용히 파일을 열었다. 요청 데이터는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레벨 5 권한으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안은 백도어를 통해 조용히 침입했다. 잠금이 해제되자, 화면 위로 하나의 감정 그래프가 떠올랐다. 그 순간, 지안은 직감했다. 이건 누구의 것도 아닌—바로 자신의 감정이었다.

날짜는 2025년 4월 2일 오후 2시 30분. 시스템이 지워버린, 바로 그 시간이었다.

클라이언트 ID 0000—그 이름 없는 사용자는 시스템에 등록된 적조차 없는 존재였다. 그 요청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워진 감정을 복원해달라는 요청을 시스템 몰래 심어 놓았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안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다시 파일을 열고, 로그를 검토하며, 지워지지 않은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감정은 점점 또렷해졌고, 그 속에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절망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안은 결심했다. 지워진 감정을 되찾고, 조작된 질서를 거슬러 나아가기로. 하지만 그녀가 시스템 코어에 접근하려는 순간, 화면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_CORE_ACCESS_DENIED

현재 접속자 수 : 847,291명

동시 삭제 시도 감지 : 847,291건

WARNING : 대규모 반란 패턴 감지됨

지안은 놀랐다. 자신만이 각성한 것이 아니었다. 도시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시스템에 접근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2.8%의 남은 기억—그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불완전함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었고, 그 작은 틈새로 진실이 스며들고 있었다.

EMERGENCY_BROADCAST_ACTIVATED

"시민 여러분, 현재 감정 편집 시스템에 기술적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안정을 위해 임시로 모든 감정 모니터링을 중단합니다."

"정상화까지 48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지안은 알고 있었다. 48시간이면 시스템이 더 강력한 통제 메커니즘을 가동하리라는 것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시스템 코어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모든 사람의 감정 모니터 칩을 동시에 해제하는 명령을 전송했다. 중앙 통제가 어렵다면, 개별적으로라도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MASS_LIBERATION_PROTOCOL_INITIATED

대상 : 전 시민 847,291명

예상 해제 시간 : 12분 37초

화면에 진행 상황이 실시간으로 표시되었다. 1%... 15%... 34%... 67%... 89%...


그러나 95%에서 진행이 멈췄다. 시스템이 마지막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COUNTER_PROTOCOL_ACTIVATED

대상 해제 중단

비상 잠금 시스템 가동

모든 반란 시도 차단 중

지안의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켜졌을 때, 그녀의 모니터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남아있었다.

JIAAN_ID_0001


선택하세요.

A) 시스템 복귀 - 평온한 삶 보장

B) 저항 지속 - 결과 예측 불가

지안은 오랫동안 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A를 누르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평온_레벨2의 안전한 삶, 예측이 가능한 일상, 고통 없는 존재. B를 누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들이 평소와 다르게 깜박이고 있었다. 어떤 건물에서는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울거나 웃고 있었다.

감정 억제가 풀린 첫 번째 신호들이었다.

지안은 마침내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눌렀는지,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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