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역설 11화

가장 가까운 타인

by 은파

언니를 만나고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일상은 예전처럼 흘러갔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옷을 입었는데 몸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평소와 같은 일정들을 소화하면서도, 어색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오늘 아침에도 방송 녹화가 있었다.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고 조언을 건네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행복은 선택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언니의 조용한 표정이 불쑥 떠올랐다. 언니는 과연 행복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그냥 살아가기로 한 걸까.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언니는 어느 쪽이었을까.

녹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요즘 들어 업무 관련 연락이 많아서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언니였다. 며칠 전 헤어질 때 번호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언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전화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며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편지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15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던 언니가, 다시 만난 지 며칠 만에 편지를 보낸다는 건 의외였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편지를 기다리는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강연 준비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혹시 지난번 만났을 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 이후에 생각이 바뀐 걸까. 질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오후, 정말로 소포가 도착했다. 발신인 칸에 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두꺼운 봉투였다. 안에는 편지봉투 하나와 작은 상자가 함께 들어 있었다. 상자부터 열었다. 안에는 낡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들,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 그리고 내가 처음 보는 사진들도 몇 장 섞여 있었다.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언니의 생일날 케이크를 들고 웃던 모습,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물을 들고 찍은 가족사진까지 그 모든 장면은 언니가 떠나기 전의 순간들이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언니가 열일곱 살 무렵 찍힌 듯한 사진이었다. 표정이 어둡고 지쳐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보니 언니의 눈동자 속에 절망이 녹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시절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던 걸까.

편지봉투를 열었다. 여러 장의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힌 언니의 글씨가 보였다. 예전보다 글씨체가 또렷해졌지만, 어딘가 조급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오랜 시간 미뤄왔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듯한 필체였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아니, 말할 수 없었던 게 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심장이 조용히 속도를 높였다.

나는 편지지를 펼쳐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때 집을 떠난 이유가······ 네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라. 단순히 반항기 때문이 아니었어. 그리고 엄마, 아빠도 모르는 일들이 있었어.”

나는 숨을 멈춘 채 편지를 붙잡고 있었다. 언니는 왜 1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조심스럽게 편지로 털어놓는 걸까. 거실 소파에 앉아 편지를 읽어가면서 마음이 점점 복잡해졌다. 15년 동안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실은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면에 언니가 혼자 견뎌야 했던 더 깊고 아픈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편지는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졌다. 언니는 그동안 숨겨왔던 진심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솔직한 고백들, 말하지 못한 아픔들, 가족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까지 조심스럽게 읽다 보니 숨이 막힐 때도 있었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순간도 있었다. 언니가 혼자서 이 모든 걸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충격이 컸던 건, 언니가 집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 시절, 나는 열두 살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어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그 일들이 언니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무지한 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편지의 끝자락에서 언니는 왜 지금에서야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지 털어놓았다. 며칠 전, 나를 다시 마주했을 때 마음속에 결심이 생겼다고 했다. 더 이상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다고······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그것이 자신이 15년 동안 미뤄온 책임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참 동안 편지를 가만히 쥔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언니의 시간, 언니의 침묵, 그리고 언니의 고백이 내 안에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편지의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면서, 언니의 글씨체가 점점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처음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쓰려했던 흔적이 보였지만, 뒤로 갈수록 글자들은 기울었고 줄 간격도 불규칙해졌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빠가 회사에서 문제가 생겼던 거 기억해? 너는 아마 잘 모를 거야.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언니의 편지는 천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떠올랐다. 집안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웠던 때가 있었고, 부모님이 밤늦게 작은 목소리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도 가물가물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회사 문제가 아니었어. 아빠가······ 아빠가 회삿돈을 몰래 빼돌렸던 거야. 그것도 꽤 큰 금액을.”

손에 들고 있던 편지가 그 순간 멈췄다. 횡령이라니. 아버지가? 믿기지 않았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어. 복잡한 상황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회삿돈을 빼돌린 거였고, 그때 집안이 온통 뒤집어졌어.”

언니는 당시 상황을 꽤 구체적으로 적어두었다. 나는 열두 살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매일 울었어. 아빠는 술만 마셨고.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어.”

편지는 점점 더 충격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서 집을 팔아야 했어. 우리가 살던 집, 할머니가 물려주신 그 집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할머니 집, 내게는 어린 시절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팔아야 했다니······ 그때 왜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됐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더 좋은 환경으로 옮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 과정에서 우리 가족이 완전히 망가진 거였어.”

언니는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원망했고, 집안은 매일 전쟁터 같았어. 너는 어렸으니까 잘 몰랐겠지만, 그때 부모님이 이혼 얘기까지 했었어.”

이혼까지 생각했었다니······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어릴 적 부모님의 관계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던 기억은 있지만, 그게 이혼을 고민할 정도였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상황에서 나는······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 매일 집에 있는 게 고통스러웠어. 부모님의 싸움 소리를 듣기 싫었고,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기도 했고.”

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일곱 살에 그런 집안 분위기를 견뎌내기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어.”

언니의 글씨는 이 부분에서 더 크게 일그러졌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엄마가······ 엄마가 이상한 일에 뛰어들었어. 무슨 투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서 돈을 빌리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게 다단계 같은 거였어.”

순간 눈을 감았다. 엄마가 다단계에 빠졌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평소엔 그런 일에 무관심했던 분이었는데. 아마도 절박함과 절망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 같았다. 그 시절, 엄마가 예민해지고 자주 전화를 붙잡고 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결국 더 큰 빚만 지게 됐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매일 전화로 누군가와 돈 이야기만 했고, 집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변했어. 특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 한가운데가 답답하게 조여왔다.

“엄마는 내가 공부를 안 한다고, 집안일을 안 도와준다고, 상황을 이해 못 한다고 매일 나한테 화를 냈어.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열일곱 살이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엄마는 나한테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바랐어.”

그 시절, 언니가 왜 그렇게 반항적으로 보였는지, 왜 집에 머무는 걸 꺼렸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집은 언니에게 더 이상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갈등과 책임을 덮어씌우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편지의 문장은 점점 무거운 침묵을 끌어안고 이어졌다.

“엄마가 나에게 말했어. 내가 대학 갈 돈은 없다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취직해서 집안을 도와야 한다고. 그때까지 내가 꿈꿨던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졌어.”

대학을 포기하라는 말은 언니에게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 언니는 공부를 잘했고, 이루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가족의 경제적 문제 때문에 내려놓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언니가 그때 집을 떠난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어른들은 그걸 가출이라 불렀지만, 언니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이었다.

편지의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몇몇 단어를 지운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 썼다가 다시 적은 듯한 문장들, 번진 잉크 자국들을 보니 언니는 이 편지를 쓰며 울었던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웠던 얼굴이 울고 있었던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팠다.

그러다, 예상하지 못한 문장이 나타났다.

“그런데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건······ 너였어.”

나는 손끝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언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걸까.

“너는 그때도 지금처럼 착했어. 모든 걸 이해하려고 했고, 부모님을 걱정했고, 집안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애썼어. 그런 네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 초라해졌어. 네가 좋은 딸이 되려고 할수록, 나는 더 나쁜 딸이 되는 것 같았어. 부모님도 자꾸 나를 너랑 비교했어. 왜 동생처럼 못 하냐고, 왜 네가 더 철든 것 같냐고.”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오히려, 그때는 내가 언니를 부러워했다. 멋지고 똑 부러진 언니, 자유롭고 단단해 보였던 언니. 그런데 언니는 나 때문에 더 힘들어했던 것이었다.

“특히 엄마가 그랬어. 스트레스받을 일이 생기면 항상 나한테 화를 냈어. ‘너는 왜 동생만 못한 거냐?’, ‘동생은 말 안 해도 알아서 하는데’, ‘너 때문에 더 힘들다······’ 그런 말들을 매일 들었어.”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을 때의 엄마는 항상 언니 걱정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말들이 언니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았을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는 너를 미워하게 됐어.”

그 문장은 편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했어. 그 모순된 감정이 나를 더 괴롭혔어. 너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너 때문에 내가 더 초라해 보이는 게 싫었어.”

언니가 나를 미워했다니······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느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그냥 사춘기쯤으로 생각하고 넘겼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의 무게였다.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도 너 때문이었어. 더 이상 너와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어. 더 이상 나쁜 언니로 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너한테 상처를 주기 전에 떠나고 싶었어.”

언니는 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떠났던 것이었다. 그게 언니의 방식이었다. 차라리 등을 돌리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길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 마음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떠나는 날 밤, 네가 자는 모습을 한참 봤어. 그때 정말 많이 울었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언니인지 깨달았어. 내가 떠나면 네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하니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

그날 밤, 열일곱 살 언니는 어떤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을까.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본 순간의 그 기억은 언니에게 어떤 모양으로 남아 있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떠났어. 너한테 미안하다는 편지라도 써놓고 갈 걸 그랬는데, 그럴 용기도 없었어. 그냥······ 그냥 도망쳤어.”

언니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도, 그날의 밤을 계속 되짚으며 살아왔던 것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새로운 빛 속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언니가 왜 나와 놀려고 하지 않았는지, 왜 말을 걸면 짜증을 냈는지, 왜 자꾸 집 밖으로 나가 있으려 했는지······ 그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미움과 사랑, 죄책감과 열등감이 얽힌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어. 너 때문이었어.”

편지는 더 깊은 상처의 층위로 파고들었다.

“가출한 후 몇 달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계속 집 주변을 맴돌았어. 네가 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진짜로 너를 만나면······ 다시 그 복잡한 감정들을 마주해야 할 것 같아서 용기가 나지 않았어.”

언니가 몇 달 동안 내 곁에 있었다니. 그 시절, 창밖을 보다 문득 언니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는 착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부산으로 떠난 건, 너와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였어. 서울에 있으면 언젠가 너를 찾아갈 것 같았거든. 그러면 또다시 그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너를 힘들게 할 것 같았어.”

언니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리를 늘려간 것이었다.

“15년 동안······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미안하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수없이 했어. 물론, 혼자서만.”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언니의 편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치 15년 동안 마음속 깊숙이 눌러두었던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숨겨진 무게가 느껴졌다.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편지를 마주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내가 알아야 할 진실을 마침내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신호 같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너를 다시 만나면서······ 깨달은 게 있어.”

언니의 문장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우리 둘이 만났던 바로 그날의 기억 속으로.

“너도 나처럼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언니가 그렇게까지 내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살아왔다. 의연한 척,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척하면서. 그런데 언니는,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그 틈새를 정확히 보았다.

“네 눈을 보는 순간에 알았어. 그 공허함, 그 피로감. 나와 똑같은 거였어. 우리 둘 다 진짜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눈을 감고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니는 말보다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았던 것이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져 있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잃은 채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어. 15년 동안 숨겨왔던 모든 걸 털어놓기로 한 거야. 더 이상 혼자서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 문장에서 언니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 편지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구조 요청이었고, 화해를 위한 용기였다. 얼마나 많은 밤을 망설이다가야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15년이라는 시간은 쉽게 지워지지도, 쉽게 말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어.”

언니의 문장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조심스럽게 꺼내려는 듯한 긴장감이 번졌다.

“내가 집을 떠난 그날······ 사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아빠와 큰 싸움을 했었어.”

그날은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고 믿어왔는데. 언니가 갑자기 사라진 그날, 내 기억은 너무 조용해서 되레 이상했다. 언니는 말없이 떠났고, 가족은 그날을 애써 언급하지 않았다.

“아빠가······ 대학 가는 걸 포기하라고 했을 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소리를 질렀어. ‘왜 내가 아빠 실수의 대가를 치러야 하냐!’라고,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평소에 잘 참고 넘기는 언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건 언니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몰려 있었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아빠가 내 뺨을······”

문장이 흐려졌다. 그다음 문장을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언니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없었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처음이었어. 아빠가 나한테 그런 적은. 그러고 나서 아빠도 충격받은 것 같았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나는 이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날 밤, 단 몇 시간 사이에 언니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자신이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느끼며, 문을 나서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날 밤에 너한테 모든 걸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할 수 없었어. 너는 너무 어렸고, 이미 집안 분위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거든. 내가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서 너를 더 힘들게 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그냥······ 그냥 사라졌어. 아무 말도 없이.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날 밤, 열두 살이었던 나는 언니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 속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어른들이 철저히 숨기고, 나는 그 안에서 눈치만 보며 자랐다.

“그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걸 알고 있어. 내가 좀 더 참았다면, 좀 더 이해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다면······ 우리 가족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 거야. 특히 너한테······ 너한테 정말 미안해. 네가 갑자기 외동딸이 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부모님의 모든 기대와 걱정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해 왔는지······”

그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언니가 떠난 후, 집은 조용해졌고, 나는 하루아침에 부모님의 모든 감정의 중심이 되었다. 말없이 기대가 쌓이고, 침묵 속에서 책임이 덧붙었다. 그게 너무 벅찼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언니 없이도 괜찮은 딸이어야 했고,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편지를 읽으며 마음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얽혀 올라왔다. 용서와 후회, 안도와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감정들은 선명하게 분리되지 않았고, 하나의 덩어리처럼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편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언니의 글씨는 이제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이 편지를 쓰는 일이 언니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를, 그 흔적들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걸 말했어. 15년 동안 혼자 감춰왔던 모든 것들을.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정말 많이 울었어. 그때의 아픔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어.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후련한 기분도 들어. 드디어 너한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언니의 마음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언니는 망설이면서도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미움까지 털어놓은 언니의 고백은, 그 자체로도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알 것 같았다.

“너한테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들려줘서 미안해. 분명 충격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어. 우리가 정말로 다시 가까워지려면, 진실부터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말은 너무도 정확했다. 다시는 서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침묵 속에서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부터 시작해야 했다. 가장 아픈 곳을 먼저 드러내야만, 비로소 마음이 닿을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마. 나는 이제 괜찮아. 정말로. 15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어. 그때의 아픔과 분노는 이제 많이 사라졌어.”

언니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편지 곳곳에 스며든 감정은, 그 모든 상처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완치가 아니라, 조금 나아졌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살아 있다는 건, 다치면서도 계속 나아간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너를 미워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어. 미워하고 싶었지만 미워할 수 없었어. 너무 사랑스러운 동생이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야. 며칠 전에 만났을 때, 여전히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그 글을 읽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언니는 날 미워하면서도 끝내 미워하지 못했다. 미워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그만큼 벗어나고 싶었던 절박함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감정. 그 복잡한 마음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지내게 될까? 당장 예전처럼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거야.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됐으니까. 하지만 천천히, 조금씩······ 진짜 자매가 될 수 있을까?”

그 문장에서 언니의 조심스러운 희망이 느껴졌다. 무리하게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지 묻는 말이었다. 관계를 재건하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건 나 역시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일 거야. 우리 둘 다 상처받은 사람들이고, 우리 둘 다 진짜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는 그 공통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고마워. 그동안 우리 가족을 지켜줘서. 내가 떠난 후에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아. 그 모든 걸 네가 혼자 감당했을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 해줬어. 정말 고마워.”

언니의 ‘고맙다’라는 말이 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나는 그저 남겨졌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고, 그것이 고마움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그때는 더 솔직히 대화할 수 있을 거야. 서로의 아픔을 감추지 말고,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야.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믿어.”

편지는 희망의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주 작고, 아주 조심스러운 희망. 하지만 나는 그 희망이 어떤 말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마지막 문장은 단순하고, 따뜻했다.

“사랑해, 내 소중한 동생아.”

그 아래, 작게 덧붙여진 추신이 있었다.

“사진들은 네가 가지고 있어. 나는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살려고 해. 하지만 네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이제는 도망가지 않을게.”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움직일 수 없었다. 15년 동안 알지 못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안도감도 있었다. 마침내 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어딘가 숨 쉴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다시 사진들을 펼쳐보았다. 처음에는 아픔으로만 읽히던 사진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언니의 웃음과 울음, 가족이 함께 버텨낸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몰랐던 진심이 가만히 스며들고 있었다. 사진은 더 이상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다시 쓰기 위한 시작점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편지를 읽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만, 이 하루는 내게 15년을 뛰어넘는 하루였다.

keyword
이전 10화이중 유리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