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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치니 Mar 28. 2024

책을 좋아합니다만

 나는 스무살까지 책을 읽지 않는 아이였다.

 마흔까지는 책을 조금 읽는 어른이었다.

 미혹됨이 많지만 '불혹'을 넘겨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에 읽어야 할 글 외에는 읽지 않았다는 것. 책장에 딱히 읽을만한 거리가 없었던 우리집. 어렸을 때 아무도 권하지도 구해주지도 않았던 책. 스스로조차 갈구하지 않았던 책. 그래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시절. 거실 바닥에 아이들 그림책이 널부러진 후에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와 다르게 책 읽는 인간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육아의 중심에 책이 있었다. 유년기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던 총량을 채우려는 듯 나를 위해서도 책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아직 내 책은 아니었다.


 독서의 입문은 둘째가 스스로 책읽기 시작할 무렵 '책 읽는 엄마 코스프레'를 한 것이 계기였다. 책을 벗으로 삼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쉬고 싶을 때 책을 찾는 아이로 키우려는 마음으로 그들의 거울이 되기 위해 책을 펼쳤다. 참 좋은 세상이다. 동네마다 공공도서관은 많고 쾌적한 환경에서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다니. 요즘 책들은 그 수준이 또 얼마나 훌륭한가.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을 방문한다. 얘들아 잘 보렴. 엄마는 이렇게 책을 좋아한단다. 나는 그곳에서 청소년 권장도서를 보았다.


 비록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그건 내 책이었다. 유년기를 지난 내 책의 수준이 청소년기로 향하고 있었고 다 큰 어른의 경험을 더해 좀더 높은 시선으로 책을 읽어냈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 나에게나 너에게나 전혀 손해볼 것 없는 일이다. 그래서 주말마다 도서관에 갔다. 그냥 그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책 읽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거기에 파묻힐 기세로 아이들 책을 빌리며 내 것도 한 권씩 끼워넣었다. 일할 때는 읽는 속도가 붙지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 책 읽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책을 꼭꼭 씹어 읽는 편이라 진도가 잘 안나간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읽어대고 싶은데 거북이 걸음이다. 그래서일까. 한 권을 다 읽으면 너무 뿌듯해서 자랑하고 싶다. 두뇌 속에 더 많은 지식을 탑재한 것 같아 아무나 붙잡고 얘기하고 싶다. 때때로 마음에 남는 여운을 주변 사람들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도서관을 제 집인양 드나들게 되었을 때 혼자 조용히 종합자료실로 향한다. 이제 어른 책을 볼 때가 된 것이다. 진짜 책을 보고 있으므로 더이상 읽는 척하는 엄마가 아니다.


 우리집은 원하는 책을 얻는데 원칙이 있다. 첫째, 도서관에서 먼저 찾아볼 것. (다른 도서관책을 대출할 수 있는 상호대차시스템은 정말 좋다. 생활반경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 도서관을 두루 이용하는 것도 즐겁다.) 둘째, 그래도 구할 수 없는 책은 알라딘 중고서적이나 당근을 활용할 것. (나는 알라딘 중고서적을 자주 애용했다.) 셋째, 새 책은 특별한 날에 선물로 사줄 것. (덕분에 아이들은 새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설레하며 서점에 간다.) 요즘은 종이책을 구할 수 없는 관계로 전자책을 구독한다. 안 읽을 핑계를 댈 게 없는 세상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이나 책이 많은 것은 똑같은데 서점에만 가면 숨이 막힌다. 서점의 책들은 '나를 읽어봐. 나를 읽어줘.' 하고 말을 거는 것 같다. 자꾸 내 시선을 잡아 당긴다. 그 많은 책들 중 읽은 것이 얼마나 될까. 나의 독서량이 우주에 점만도 못하게 느껴져 좌절감이 밀려온다. 거기 놓인 모든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나는 그냥 남이 읽던 책이 좋다. 누군가에게 몇 번을 읽혔을 타인의 손길이 무수히 닿은 그 책들은 안도감을 준다. 천천히 읽어도 돼. 다음에 와서 빌려도 돼.

 

 새로운 생활에 적응도 어렵고 생산성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옵션을 생각해봤지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이 귀한 시간에 나는 똑똑해지고 싶다. 책을 읽고 싶고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동안 못했던 독서의 빈 자리를 채워나가고 싶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한 분이라도 오시면 좋겠다고 기대했는데 이틀만에 다섯 분이 신청하셨다. 책에 대한 갈증이 나만은 아니었구나.)


 독서모임은 정말 즐겁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이제라도 알게되어 다행이다. 매주 같은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다보면 책에 대하여 작가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책을 통해 성장하고 책을 통해 치유받는다. 더욱이 나이 불문 누구나 할 수 있는 좋은 취미이다. 읽은 책을 기록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 되었다. 언제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짤막하게 남긴다. 다독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난 후 쌓여가는 도서목록을 보면 큰 보람이 되리라.  

 

 우리 아이들은 종종 엄마의 꿈을 물어본다. 내 꿈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서가 되는 것이다. 기왕 부자가 된다면 도서관도 하나 짓고 싶다. 미래의 도서관은 지금 상상도 못한 모습일 것이기 때문에(그때 종이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것을 머릿속에서 설계해보는 일은 재미있다. 처음 포지셔닝을 잘한 덕분에 아이들에게 엄마는 책이 보물 1호인 사람(무인도에 갈 때 딱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는 질문에 호기롭게 '책'이라 대답한 걸 잘도 기억한다.)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 진심으로 책을 사랑해보자. 책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언제 좋아해도 늦지 않다. 인생은 짧지 않고 읽어서 좋을 책은 세상에 많으니까.

 

 사진 출처 : Pixabay. Eli Digital Cre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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