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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Jul 31. 2023

상실감을 대하는 자세

어떻게든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지난 토요일, 남편의 병원에 개원 초부터 함께 했던 한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고사직은 흔한 일이 아니라 저와 남편도 많이 떨렸고 고민했습니다. 해고 사유가 될 만큼 중대한 귀책은 아니나 업무 상 태도, 함께 일하는 타직원들과의 관계에 1년 반이 넘도록 문제가 지속되었기에 큰 결정을 하고 면담을 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며 저는 권고사직안과 근무시간 축소 안 두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본론을 꺼내기까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상황을 빨리 받아들여 사직하겠다고 했습니다. 차분하게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러긴장하고 경직되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는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탈의실에서 홀로 1시간가량을 울다가 퇴근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오래전,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사이가 멀어진 지 2년이 넘었는데 어떻게든 복구해 보려는 저의 의지로 버텨왔습니다. 그렇게 조금 관계가 회복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헤어지자.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그 사이 저는 잘하고 그는 못하고 그러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화를 크게 낸 적이 있었고, 헤어지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도 있었죠. 그러니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헤어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저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헤어짐을 통보받은 다음 날, 저는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대학병원 전공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정말로 제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전신 마비가 온 듯했습니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오후가 되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하러 나갈 수 있었지요.


헤어짐을 통보받은 지 1주째, 저는 다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어떻게든 상황을 되돌리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야, 일이 바쁘거나 사는 게 힘들어서 헤어지자는 게 아니야. 정말로, 정말로 그만 만나고 싶어."


그제야 저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울고 미친 듯이 울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이젠 그만 울고 다른 사람을 만나 즐거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9년이나 만났으니 잊는데도 9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 달이면 웬만큼 견딜 수 있었던 거죠.


 저에 9년간의 일들추억보다는 그냥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미 멀어진 사이를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고, 서로의 일상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도 없이 그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만 규정된 사이. 저는 상실이 두려워서 그 끈을 놓지 못했을 뿐, 놓고 나니 한결 나아져서 다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게 아닐까요.


이 친구도 여러모로 입사초기와는 너무 달라져서 '우리 병원을 그만두고 싶은 건가?'라고 느껴지는데 막상 문제점을 얘기하면 또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있으면 힘들 법도 한데 힘들지 않다 하고, 변명도 별로 없이 알겠다고는 돌아서면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연차를 쪼개어 쓰는 조기퇴근도 잦아졌습니다. 그녀는 니기 싫은 직장에 꾸역꾸역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을 보니 저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마지막 출근일,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유의 업무를 인계하며 하루를 성실히 일하고 퇴근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일에는 끝이 있다. 어느 날 김진형 선생님(편집자)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즘 유래라는 말을 계속 곱씹고 있어요.-중략- 우리는 분명 누군가로부터 유래한 사람들인데요. 그가 저를 낳은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저를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어요."
그러자  이 책이 끝나도 끝나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었다.

-이슬아, <끝내주는 인생>중 에필로그, 디플롯, 2023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유래라면, 상실과 소멸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육체의 죽음뿐 아니라 존재의 의미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죽음으로 인식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혼란으로 가득한 개원 초기부터 오늘까지, 울고 웃으며 애써주고 함께 고민했던 그 직원과의 시간들은 저와 남편이 기억할 것입니다. 헤어진 연인과의 시간도 기억으로 남으니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것이 소멸이 아니라는 믿음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나름의 논리로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 봅니다. 퇴직한 직원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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