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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Sep 28. 2021

인테리어를 시작하는 마음

내 집 인테리어인데, 왜 기쁘지 않을까

 내년 초,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임대차법 덕분에 내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전셋값 감당이 쉽지 않아서라고 해도 절반은 맞는 변명이다.

 부지런한 재테크에 관심은 있으나 실행력이 부족하고 간이 작은 나는, 결국 결혼 10년 동안 딱히 한 게 없었다. 소소하게 적금 들고 적립식 펀드 하고, 주식은 까먹고.


 5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다시 2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니 친정집이 비었다. 동생 혼자 살기에는 컸다. 게다가 부모님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먼저 날아드는 건 바로 상속세 고지서다.

 우리는 특별히 상속세를 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재산이라곤 집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의 시세대로 감정가가 정해지는데, 하필 바로 그 3개월 사이 5년간 요지부동이던 집값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엄마를 간병하고 장례를 치르느라 부동산 시세를 볼 겨를이 없었던 나와 동생은, 서둘러 세금 낼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당시는 이사철이 아니라 입주 수요자가 없어, 주변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전세를 내놓고도 6개월 이상 걸려 세입자를 구할 수 있었다.


 아빠의 이른 퇴직으로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우리 집은 나의 대학 입학과 함께 1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팔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집을 팔고 근처에 전세를 사는 동안, 그 아파트 가격은 엄청나게 올랐다. 가진 건 집 하나뿐인 우리에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신 아빠의 요양을 위해 공기 좋은 신도시의 토지 한 칸을 분양받았다. 처음엔 다세대를 조그맣게 지어서 월세로 먹고살 궁리를 했던 부모님은, 옆 블록의 전원주택단지가 좋아 보이셨는지 그냥 주택을 지었다. IMF 여파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였다.


 엄마는 좋은 건축가를 만나 저렴한 가격에 집을 짓고, 스스로 발품을 팔고 디자인과 자재를 고르며 즐거워다. 그렇게 지은 예쁜 우리 집에서 10년을 살면서 마당에 김치도 묻어보고, 잔디도 다듬고, 비록 작은 집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재미있는 생활을 했었는데.....


 이렇게 글로 쓰다 보니 겉으로는 참 아름답고 좋은 공간인데 내게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그 안에서 벌어졌던 어쩌면 내가 모를 가족 내 갈등이 먼저 그려진다. 내가 다녔던 대학은 차로 다닐 만한 거리였지만 나는 자취를 선택했다. 시간을 아껴 공부할 필요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엄마, 아빠 두 사람만의 갈등이 아니라 동생이 커 가면서 동생-엄마/아빠의 갈등으로까지 번져가는 집에 나는 방학 때 있는 것조차도 큰 소리가 날까 두려워 피하고 싶었다. 천정이 높고 방이 많은 그 주택은 내게 너무 넓어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졸업을 하고 결혼 할 무렵, 아빠는 핫한 신도시의 아파트 분양에 생애 최초로 성공했다. 바로 내가 이사 갈 그 집이다. 다만 그 예쁜 주택이 팔리기까지 2년이 걸렸기에, 아빠는 입주 기간이 지나서야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온다 해서 가족이 갑자기 화목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삶을 시작한 엄마 아빠는, 이런저런 불평으로 힘들어하는 날이 많았고 결국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다.> <네가 하는 말은 나에게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는 말까지 엄마 입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는 친정에서 40분 거리에 살았지만 여전히 그 숨 막히는 어둠과 슬픔을 그대로 느끼며 나의 공간에서 흐느껴 울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마치 어릴 때 우리 집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집이, 이제 우리 네 식구의 집이 된다.

지금 직장에서 우리 집은 걸어서 10분, 이사 갈 집은 차로 45분이다. 하지만 남편은 적극적으로 이사를 원했고 개정된 임대차 법은 우리의 이사를 정당화해 주었다.


 그곳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화려한 동네로 바뀌었다. 백화점을 낀 화려한 상권이 들어서고 높은 빌딩이 올라간 그곳을 다녀온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왕복 1시간 반을 출퇴근해야 하는 고단함은 모르고 그저 좋아한다.


 인테리어 역시 나보다 남편이 더 열심이다. 실내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업체를 직접 선정하고, 수많은 미팅 끝에 인테리어 공사를 앞두고 있다. 

 

 세입자가 나가고 실측을 하며 지난 일요일 디자인 실장과 직접 미팅을 하고 온 남편은 내게 예측 조감도를 보내주었다. 샘플 사진과 함께 우리 집의 변할 모습이 담긴 pdf 파일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집이 이렇게 예쁘게 변한다고?"


아, 내가 왜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고 즐겁지 않은지 이제야 알겠다.

나는 엄마 아빠가 행복하지 않았던 그 공간에 들어가서 예쁘 꾸미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죄스러웠던 것이다.


 인테리어라고는 눈곱만큼도 손대지 못하고 그저 관리비 아껴가며, 생활비 아껴가며 살았던 엄마의 공간에 가서 모든 것을 새 것으로 바꾸어 놓고 행복하게 살 궁리를 하는 나. 나는 집에서 일찌감치 나와 자취를 하며 내 인생을 차곡차곡 일구어 갔던 우리 집의 이단아였다. 나만 행복한, 아행복해 보이는 배신자 혹은 광복절 특사로 나온 특별 사면 죄수였는지도 모른다.


 40대 초반에 부모님의 집을 상속받는 심정은 사실 참담하다. 이 집과 내 원가족의 소소하게 행복 시간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까? 


영화 <미나리>의 감독은 미국에서 교포 2세로서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에게 감동한 것은 비록 가치관은 다를지언정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삶을 통해 그렸다는 것이다. 정작 부모님은 벗어나고 싶어 했던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그는 부정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나 역시 부모님의 인생을 부정하지 않고 조금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나가고 싶다. 어린 시절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에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이 계셨던 그 공간에서, 다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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