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가 있는 새는 날기 위해서 뼈를 비웠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도 최소한으로 먹는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대가로 가장 연약한 몸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새를 반려동물로 키우면서 금전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다. 먹이를 많이 먹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좋은 걸로 급여를 해도 혼자 먹다 보니 양이 줄지 않는다. 이것저것 골고루 사서 많이 먹이고 싶은 마음에 주문한 사료들이 줄지 않아 한가득하다. 속담에 '새 모이 먹듯' 한다는 의미를 실감하고 있다. 새를 반려동물로 키우면 배불리 먹고 통통한 배를 보는 뿌듯함은 포기해야 한다. 입이 짧아 편식하는 남편을 둔 기분이랄까? 편식하는 남편은 용서가 안 되지만 앵순이는 귀여운 외모 덕분에 모든 게 용서된다.
새는 나무를 주거 공간으로 살던 동물이어서 나무가 고향같이 느껴질 것이다. 앵순이가 고향의 맛을 제대로 찾았다. 천연 나무 대신 가공 된 종이 맛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도 가공식품을 더 맛있어하지 않던가?) 책 뜯는 재미에 푹 빠져 집에 있는 책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가장 맛있게 먹은 책은 김상욱 교수님의 <양자 공부>다. 다행히 교수님 얼굴은 뜯지 않았다.(김상욱 교수님 죄송합니다.)
순수 문과 출신이 양자를 이해해 보겠다며 산 책은 내용을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 대신 '슈뢰딩거의 앵무새'라고 했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알 수 없으나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는 말은 사고 실험이긴 하지만 한 생명의 생사를 걸고 실험했다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현대 시각으로 보면 동물 학대(?)다. 앵무새라면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날아갔는지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라는 온건한 표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