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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빛 Oct 30. 2022

짜조와 스킨로션-2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언니는 베트남 사람으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딱 봐도 차분한 사람인 걸 파악한 나는 세번째 룸메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눈치를 보며 최대한 조용하게 짐을 풀었다. 언니는 계속해서 나오는 짐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와, 짐이 어쩜 그렇게 많아?” 라고 중국어로 얘기했다. 조금 머쓱해진 나는,

“아니, 내가 짐이 많나? 보통 정도 일걸?” 이라고 대답하며 언니 짐을 흘끗 봤는데, 세상에 정말 책상에 살림살이가 없다.


언니가 가장 신기해 한 것은 책상에 나열해 놓은 한국 화장품들이었다. 기초 화장품만 꺼내놓은 것인데도 저걸 다 얼굴에 바르냐고 신기해했다.


하필 그 화장품이 그 당시에는 백화점에서만 팔아 나도 용돈을 모아 면세에서 겨우 산 거라 혹시나 언니가 박탈감을 느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언니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신기했던 것 같다. 정말 화장품이 신기했는지 이것 저것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물어봐서 나도 열심히 대답해주니 연신 “이런 데 쓰는 물건도 있구나“하고 하면서 빙긋 웃었다.


그 전 룸메이트들과는 한국어 아니면 영어로 대화했는데, 언니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대신 수준급의 중국어를 구사했고, 우리 방에는 늘 CCTV(중국뉴스)가 틀려져 있었다. 계속 중국어가 들리는 데다, 어설프게나마 계속 언니와 중국어로 대화하니 중국어 실력이 느는 데에 언니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언니는 정말 다정했다. 고작 다섯살 차이였는데, 내가 못 일어나면 절대 혼자 나가지 않고 꼭 흔들어서 깨워줬다. 그리고는 분명 아침을 못 챙겨 먹을 것 같았는지, 아침거리를 파는 곳을 이곳저곳 자세히 알려줬다. 저녁에 늦게 오면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꼭 안부를 물었다. 구구절절 대답하면, “응, 잘했네” 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어디서 맛있는 것을(예를 들면 만두같은 것) 사오면 꼭 잘 두었다가 나한테 줬다. 별 것 아닌 저렴한 음식이었는데 하나씩 남겨둔 언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배불러도 맛있다고 나도 웃으며 먹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적응이 안 되었던건 베트남 억양이었다.


원래도 약간의 비음이 있었지만 조용조용 얘기했던 중국어와 달리, 베트남어는 모국어니 더 빠르고 목소리도 커졌다. 베트남 역시 성조가 있는 나라여서 그런지 귀에 박히는 것이 남달랐다.


주말 아침마다 도대체 누구와 전화를 하는 것일까.

올빼미형에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나에게는 주말 아침마다 들리는 전화가 형벌같았다. 이미 중국 수업들의 1교시가 8시에 시작하는 통에 나는 주중에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주말에는 달콤한 늦잠이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봤을 때, 이제 이사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그리고 앞선 룸메이트들에 비하면 아침 전화만 빼면 언니는 조금 무뚝뚝할 뿐 정말 다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주말 아침이 조용했다.

아 행복하다~하고 달콤한 아침잠을 만끽하고 있는데, 어? 어디서 맛있는 냄새와 낯선 향신료 냄새가 난다.


“일어나서 먹어봐“ 라고 언니가 침대 맡에서 평소의 무뚝뚝한 말투로 말한다. 세수하고 나와보니 침대 앞 바닥이 잔칫상으로 바뀌어져 있다. 눈을 떴을 때 누군가 차린 음식이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라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그런데 베트남 음식을 안 먹어 본 것은 아닌데, 메뉴들이 어쩐지 좀 낯설다.


“이거 다 직접 만든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서 먹는거야“라고 언니가 조용히 얘기한다. 중국에 있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동남아의 향신료도 만만치 않다. 고수와 강한 향신료는 잘 먹지 못하는 나에겐 조금 레벨이 높은 음식이 많았다.


언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 표정을 흘끗흘끗 유심히 본다. 그래서 더 열심히 먹었다. 음식의 대부분은 맛없진 않지만 어쩐지 낯선 맛이었는데, 그 중 튀김 같아 보이는게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춘권 모양이었는데, 겉이 좀 더 부슬부슬하고 안에는 양념한 고기가 가득했다. 고기가 느끼할때 쯤 향신료가 스쳐가면서 잡아주는 맛이 너무 좋았다.


“와! 이거 정말 너무 맛있다!! 이거 이름이 뭐야?” 하고 물어보니,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짜조. 더 먹어, 니가 다 먹어도 돼”라고 대답한다.


한참 먹다보니 문득 조용했던 아침이 생각이 나서 왜 오늘은 아침에 전화 안했냐고 물어봤다. 언니는 “미안, 혹시 시끄러웠어?”하고 대답하고는, “아이가 아픈데, 내가 못가서..”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다.


머리를 누가 한대 때리고 간 것 같았다.

아니, 언니 너무 앳된데? 아이가 있다고?


“언니 스물 일곱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이를 일찍 낳았어. 다섯살이야”  

어쩐지 지금까지의 모든 다정함들과 챙겨받던 것들이 생각나서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데, 언니 아이 많이 아픈거래?”

“감기래”


솔직히 아직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한 나는 고작 감기로 이렇게 절망하고 슬퍼하나 싶은 마음이 스쳐갔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 옆에 있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고작 내가 어떻게 헤아리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유난히 크고 높은 톤의 목소리였던 이유가 설명이 된다. 나는 베트남어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이랑 통화하느라 그런 거였다. 아이의 아픈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어서 오늘 아직 통화를 못했다고, 자기가 여기 있는게 너무 미안하다고, 이게 맞는건지 모르겠다고 연신 훌쩍인다.


내가 또 어렸을 때 많이 아파봤지. 엄마의 입장은 못 대변해줘도 아이의 입장은 잘 대변해 줄 수 있다.


“감기는 금방 나을 거야 언니, 걱정하지 마.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 친구는. 엄마가 응원해주면 더 빨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냥 아프면 엄마 목소리가 엄청 듣고 싶을 거 같아”


조용히 남은 음식 정리를 하고, 나는 언니가 통화를 할 수 있게 아~커피 마셔야겠다~하고 방을 나왔다.

커피를 못마시는 언니에게 줄 우롱차를 한손에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언니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문을 열면 “왔어?” 라고 얘기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정겹다.


사람 마음이 정말 웃긴다.

그렇게 짜증나고 힘들었던 주말 아침의 쨍쨍한 통화를 들으면 이제 표정이 그려져서 마음 한켠이 따스해진다. 신나서 엄마와 통화하는 다섯살 아들과, 보고싶어하는 엄마의 빙긋 웃는 웃음이.




비자상으로나 기숙사로나 연수가 끝나고도 꽤 오래 머무를 수 있었지만, 언니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바로 귀국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사실 비용적으로 보면 정말 아깝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 사진만 보는 언니를 보면 이해가 갔다.


언니에게 보살핌받은 게 너무 많아서 뭐라도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줘야 좋을까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첫날 언니가 신기해한 화장품들이 생각났다. 마침 다행히 동일 브랜드가 중국에도 들어와있어서, 버스를 타고 큰 백화점에 가서 큰 맘먹고 세트로 샀던 기억이 난다.


수출된 화장품이니 가격이 거의 2배라 유학생 주머니 사정에는 꽤 비쌌지만, 받고 너무 좋아하다가도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언니의 표정을 보니 1원도 아깝지 않았다.


너무 빨리 아이를 낳은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대신 그만큼 나는 젊을 때 자유로워 질 거야 라고 씩 웃으며 대답하던 언니.


직접 만들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언니와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걸까? 내로라하는 베트남 음식점을 가보고, 심지어 베트남에서도 먹어봤지만 아직까지 언니의 짜조를 넘어서는 것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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