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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빛 Sep 15. 2022

소보로빵과 말하기듣기쓰기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두시 반경의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할머니가 혼수로 가져오신 검은색 괘종시계는 안방 왼쪽 벽에서 둔탁하게 채칵채칵거리고, 오른편에서는 느릿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며 누워있는 나른한 초여름의 낮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그날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께 듣고 적어오라는 말하기 듣기 쓰기 수업의 숙제가 있었다.  


하지만 맞벌이인 나의 부모님은 느긋하게 저녁에 말해주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좀처럼 나에 대한 일, 엄마와 아빠 자신에 대한 일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야기 해준다고 해도 아주 두루뭉술하게만 얘기해준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선 본 일부터, 아빠의 옛날 헤어스타일,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도 외할머니한테 쭉 들어왔다. 이번 숙제도 역시 외할머니에게 의뢰할 참이였다.


동네빵집의 소보로빵을 우물거리며 배를 깔고 누웠고, 한손에는 연필을 쥐었다.


'아니, 우리 손녀에 대한 이야기면 할말이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하나~'

로 서론이 시작되었다.


외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시다가,

'근데 너는 니가 태어나지 못할 뻔 했던 거 알고있냐~?'고 물어보신다.

연필을 다시 쥐게 되는 순간이다. '아니 할머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빨리 말해주세요'


태어나지 못할 뻔 하다니 어쩐지 좀 무서우면서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다.


'너희 엄마가 진통이 엄청 길었던 거, 너는 모르지? 너 낳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 이틀을 아이고...이제 나온다고 다들 엄청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안내방송이 나오는 거야. '


00님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네요, 그런데 공주님이 숨을 안쉬어요


'아휴 정말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탯줄이 목에 감겨서 숨을 못셨다고 하드라고. 조금만 늦었어도 응? 우리 이쁜 손녀딸 못볼 뻔 한겨~아니 아이고! 물이 넘치네!'

하고 할머니는 급히 부엌으로 사라지셨다.


나는 괜히 목을 만져보았다.

여기에, 걸려있었구나.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구나.


빵을 한입 삼키는데, 어쩐지 갑자기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따스했던 안방의 공기가 조금은 서늘해졌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부엌일을 정리하고 할머니는 돌아오셨다. 약간은 괜한 이야기 했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그래서 감기니 뭐니 자주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우리 손녀딸이 응? 이렇게 이쁘게 나와서 얼마나 다행이여'


그리고 마지막 대사는 늘 똑같다.


'그리고 이건 응? 알지? 엄마랑 아빠한텐 비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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