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져버린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흰 우유가 그랬다. 우유급식이란 것이 존재했을 때, 당번이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한손에 들고 교실 문을 열면 한숨부터 나왔다. '또 해치워야 하는구나'
물론 좋아하려고 노력을 안한 것이 아니다.
한 봉지만 있으면 반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초콜릿 가루의 힘을 빌어도 보고, 우유를 좋아하는 친구를 은근슬쩍 매수도 해봤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는 그 밍밍하고 비린 맛이 정말 싫었다. 세월이 꽤 흐른 다음에야 커피와 함께하는 우유의 고소한 맛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흰 우유만 마시는 것은 여전히 별로다.
초콜릿 가루도 그랬다. 어딘가 텁텁한 그 맛.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상쾌한 단맛이라던지, 텁텁하더라도 으스러지듯 포근한 단팥의 단맛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달아!'하는 그 맛이 나는 싫었다. 어쩌면 초콜릿 가루는 늘 내가 싫어하는 흰 우유와 함께하는 단짝이어서 싫었을 지도.
한편, 인위적인 쨍한 단맛의 반대편에는 연하게 스쳐가서 어라? 하는 단맛도 있다.
너무 연해서 이게 단맛이야? 하지만 궁금해서 계속 찾게되는 실낱같은 단맛.
어릴적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면 우리는 점심시간 수돗가에서 작은 풍선에 물을 넣어 서로에게 던지며 놀았다. 수돗가 옆에는 짙은 진홍빛의 사루비아 꽃이 줄서서 펴있었다. 신나게 물풍선을 던지다 수업에 들어가기전, 우리는 사루비아 꽃을 먹곤했다.
붉은 사루비아 꽃 중간에 있는 순을 따서 입에 넣으면 찰나에 아주 엷게 단맛이 스쳐간다. 선생님들은 농약을 뿌리니 위험하다고 먹지말라고까지 했지만 모두 몰래몰래 따서 먹어서 사루비아의 순이 남아나지 않았다.
나에게 사루비아 단맛의 비밀을 처음 알려준 친구는 책만 읽던 조용한 친구였다.
한쪽에는 왁자지껄 축구하는 아이들이, 다른 한쪽에는 사방치기로 정신이 없는 운동장에는 보통 보이지 않고, 보통은 도서실에서 점심시간 내내 안나오던 친구였다.
그러다 어느날 그 친구가 수돗가 계단 위 그늘에서 쉴 때 슬쩍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사루비아의 비밀을 몰랐을 때 몰래 그 단맛을 나긋히 알려주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단맛이 난다고.
햇빛을 잘 보지 않아서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붉은 사루비아를 물고 까르르 웃던 친구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아주 미미해서 더 자주 생각나는 사루비아처럼 우리는 가까운듯 먼듯 꽤 오랫동안 사귀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