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밀레니엄 버그'. 컴퓨터 대부분이 2천 년을 공공년으로 인식해 90년과 착각. 심각한 시스템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문제였고, 이는 꽤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킬 거란 관측이 연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한참 PC방에 미쳐있던 나에겐 밀레니엄 버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저그'라는 '버그'를 때려잡는 게 더 중요한 과제일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쯤 친구들은 여러 가지 계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구름사탕과 친해지는 계파. 벌써부터 인생의 발판을 본인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계파. 그리고 신세계에 눈을 떠 더 나은 도파민을 찾아 오직 직진만을 외치는 나 같은 계파. 나는 그저 게임이 좋았고 게임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우리 아버지는 예전부터 오락실을 다니는 나를 혼내는 방식이 남달랐다.
"자, 5천 원 줄 테니까 어디 한 번 실컷 해봐!"
보통 이러면 아버지의 호통에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눈치 보다 집으로 끌려가는 게 일반적이라면.
나는 달랐다. 아버지가 주는 5천 원을 나비처럼 날아 벌레처럼 낚아채어서 그대로 오락실 아저씨에게 달려가 동전 20개와 지폐 3장을 받아 쥐곤 주머니에 몽땅 집어넣고 평소때 하고 싶던 오락기계 앞에 가서 앉아버렸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한참이나 묵묵히 지켜보시다 집을 가셨고, 난 그게 무서웠다기보단 '내가 아버지를 이겼다'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해가 떨어질 때까지 오락실에 남아 게임을 즐겼다. 아버지는 얼마나 속이 타셨을까.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니 그 당시의 아버지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나이의 가장이셨다.
돈을 다 쓸 때쯤 되어서야 쾌락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란 놈으로 치환되었고, 벌벌 떠는 두 다리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니 어머니께선 반갑다며 그 다리를 시원하게 매타작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나는 적어도 그런 놈이었다. 하고 싶은 건 꼭 끝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고, 아버지도 그런 나를 존중해 마지않았다. 아아 불타는 효자로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먹고살만한 서민층쯤은 되었던 것 같다. IMF로 인해 우리 집 또한 타격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어음을 잔뜩 받으신 아버지는 점차 늦어지는 퇴근시간과 몇 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아버지의 운수업은 다행스럽게도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해 주었기에 나는 자그마한 2층의 단칸방에 살았어도 늘 부족하게 살지는 않았다.다만 어머니가 해주신 아침은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도 일을 하며 돈을 모으셨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지만 난 늘 가난하다 생각지 않았다.)
철봉과 미끄럼틀의 바닥을 파헤쳐 백 원짜리를 줍고 50원짜리 덴버껌을 씹으며 하루를 보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자. 다시 밀레니엄 버그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이 시점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유" 하고 외치는 이유는 이 시기에 마침 아버지께서 최초로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준 날 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300만 원을 호가하는 주X테크 컴퓨터와 매달 4만 원의 고정지출이 발생하는 하X로인터넷도 같이 설치해 주셨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드디어 패배를 선언하고 효자로 거듭나겠노라 말씀드렸다. 물론 지금도 나는 여전히 불타는 효자라 생각한다. 못났다.
그리고 밀레니엄버그는 사회적 이슈에서 가십거리 정도로 강등되며 2천 년을 맞이했고, 사이버가수 아담만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둥 밀레니엄 버그를 정통으로 때려 맞고 자취를 감추었는 둥 다양한 구설수만이 더 큰 이슈로 자리 잡혔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향한 내 일편단심은 포트리스2 라는 게임덕에 양다리를 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