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의 나, 오프라인의 나.
엄마, 나 면접 다녀올게 #4
┃같은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어.┃
1999년 연말에 출시되어 2000년도부터 '포트리스2'라는 게임은 '스타크래프트'의 아성에 도전할 정도로 큰 이슈를 몰고 왔다.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해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실력은 정상궤도를 향해 나갔다.
당시 철저한 계급도로 나눠진 게임 특성상 왕관(상위 20명 내외 계급)은 첫 페이지에 채 20명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 인원들은 금, 은, 동메달(전체 유저의 1~5% 내외) 순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거기서 50위권 안의 금메달리스트였기에 조금이라도 랭크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수히 노력하던 시기였다. 한참 혼자 게임을 즐기다 내 플레이가 마음에 든 어느 유저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 클랜이란 것을 최초로 가입하게 됐다.
온라인에서 앞의 몇 글자를 서로 똑같이 맞추고 매일 만나 인사를 하며 공동체의식을 느껴보는 감정은 매우 새롭고 신선했다. 처음으로 느끼는 소속감? 든든함? 아무튼 하나의 집단이 되는 건 게임을 좀 더 소속감을 갖고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형! 누나! 방가방가! 하이루!"를 외치던 풋내기 중학교 2학년은 어느덧 중학교 3학년으로 접어듦과 동시에 형들과의 첫 모임을 갖게 되었다.
당시 클랜의 마스터 형이 24살이었다. 대부분 20대였기에 10대인 나는 모임을 갖는데 큰 용기를 내야 했고 어머니는 뭐든 경험해 보는 게 좋다며 적극적으로 권유해 주었다.
걱정반 설렘 반으로 어머니가 주는 2만 원을 얼른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목적지를 향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버스에 올랐다.
대구에서 나름 유명한 대명동 계대의 밥집 앞에서 보기로 했다. 2000년대엔 한참 휴대폰이 보급되려는 시기였다. 하지만 중학생의 나에겐 사치품에 가까웠기에 형들과의 연락을 취할 길이 없을 거라 판단해 미리 입고 갈 옷을 게임에서 말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난 광경이기도 하다. 당시 형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었는진 모르겠다.
멀리서 오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정작 내가 그들에게 다가갔을 땐 어색함과 낯섦이 느껴졌다. 닉네임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앳되거나 혹은 잘생기거나 덩치가 크거나.
그저 첫 모임에서 만난 형 누나들은 '어른'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충분했고 또 굉장히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상상하던 그들과는 달랐다.
당시 중학생의 나에겐 24살은 너무나도 '어른' 그 자체였다(지금의 밀레니엄 베이비분들이 딱 이 나이다). 아무튼 쪼그라들었다. 무서운 감정이 아니라 낯설고 어색한 감정이 몸을 지배했다. 온라인에서 깝죽거리며 형! 형! 을 외치던 나는 오프라인에서 쭈구리였다.
어버버 말을 더듬고 고개를 잘 들지 못하며 잔뜩 움츠린 채 밥을 대강 삼킨 뒤 분위기를 그리 오래 살피지도 못하고 클랜장 형에게 먼저 가보겠노라 말했다.
붙잡는 그의 손 길을 뒤로한 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어쩌면 당시 그들을 어른으로 부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중학생인 나를 위해 첫 모임 장소를 '술집'이 아닌 '밥집'으로 골라주었다는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만이 아련했을 뿐.
집에 도착해서야 내가 가져간 2만 원이 3만 원으로 바뀌었단 걸 알게 되었고, 24살의 어른스러웠던 그 형이 내 주머니에 조용히 찔러 넣어준 고마운 지폐였다.
하지만 고마운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포트리스에 점차 흥미를 잃고 온라인의 내 모습과 오프라인의 내 모습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포트리스를 그만두었다. 어색했던 오프라인의 나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단 것이 마치 민낯이 드러난 사람처럼 움츠러들어 그들을 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직업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기도 했다.
모쪼록 나는 포트리스를 그만두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