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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Dec 16. 2018

베이징 특파원들은 임기를 마치면 '만세삼창'을 외친다

#단상 #에세이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떠난 자들에 대한 단상>
    
    '만세, 만세, 만세'
    광복절을 맞은 조선인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아니다.
    베이징 특파원 임기인 3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들이 항상 마지막 환송회 자리에서 하는 일종의 세러머니라고 할까.
    이 만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겼다. 일단 집에 간다는 기쁨, 북중접경 지역 같은 사선을 넘나들고 중국 정부의 취재 감시와 견제를 뚫고 3년간 버텼다는 애환,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중국을 떠난 다는 시원한 감정이 뒤섞인 만세 삼창이다.
    특파원 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국은 가고 싶어 갔다가 더 친미가 되고, 일본은 차선으로 갔다가 친일이 되고, 중국은 마지못해 끌려갔다가 더 반중이 된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중국 생활이 힘들고 중국이란 나라가 취재하기에 험난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집에 돌아갈 때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섞여서 만세 삼창이 나온다고 한다.
    어제는 한 방송사 K선배의 환송회가 있어 한국 특파원들이 모두 모였다. 또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싱가포르 연합조보 L기자의 임기가 곧 끝나 조촐한 환송회를 친한 선배와 함께 열어줬다.
    베이징에 와서 술을 끊으신 K선배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귀임 축하주를 넙죽넙죽 받아 마셔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선배는 후배들이 '상록수' 선배라고 부르는데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바른 선생님 같다고 해서 후배 기자들끼리 부르는 별명이다.
    상록수 선배는 항상 겨드랑이까지 올리겠다는 각오로 바지춤을 추어올리는 바른 옷 매음 새를 유지하시고, 후배들에게도 친절한 말과 따뜻한 위로를 잘 해주신다.
    특히 우리 둘째와 같은 반에 다니는 늦둥이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데 어제도 1차가 파하고 잠시 이동 중에 만나 언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등을 묻다가 어김없이 딸이야기로 넘어갔다.
    이 선배가 대단한 것은 임기 동안 그간 바빠서 마치지 못 했던 석사 논문을 마무리해 학위를 마쳤고, 엄청나게 두꺼운 책도 번역하셨다는 점이다. 항상 바쁜 사람인데 언제 저런 것을 다 했는지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범이 되는 그런 훌륭한 분이다.
    아. 잠깐 베이징 특파원들이 귀임할 때 하는 요식적인 행사 순서에 대해서 소개를 할까 한다.
    뭐 행사랄 것도 없는데 일단 그달의 간사가 진행을 맡아서 행사를 진행한다.
    베이징 특파원단은 보통 평시 35명 정도 수준을 유지한다. 중국스럽게 특파원단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중국이 한국에서 가깝고, 베이징에 특파원을 보내면 중국에서 나오는 웬만한 기사에 현지 바이라인을 달 수 있기도 해 가성비가 좋다.
    무슨 말이냐면 상하이에서 국제수입박람회가 열리면 베이징에 특파원이 있으면 현장에 가서 [상하이=ㅇㅇㅇ 특파원] 이렇게 기사를 쓸 수 있고, 또 쓰촨 같은 지역에 재해가 나면 [쓰촨=ㅁㅁㅁ 특파원] 이렇게 기사 첫머리에 바이라인을 달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특파원단 규모가 큰 데다가 기자들 자체가 말이 많은 족속이기 때문에 진행자가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안 들리고, 기본적으로 진행자 말을 잘 안 듣는다. 약간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저 만세 삼창이 나오면 아주 잠깐 귀중한 집중의 시간이 도래한다.
    이때 귀임자에게 바치는 후배 또는 선배의 헌사가 낭독된다.
    환송패에 적힌 문구는 귀임자가 헌사를 써 줄 사람을 지정해 작성되는 데 허구한 날 글을 쓰는 사람들이지만 이 환송패 문구를 쓰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나도 후배 J군을 보낼 때 부탁을 받고 한 번 써 봤는데 내 글짓기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드려서 작성했다.
    보통 헌사의 컨셉의 세 가지다.
    하나는 감동, 두 번째는 재미, 세 번째는 무미건조.
    감동의 문구가 환송회 자리에 울려 퍼지면 귀임 당사자나 중년을 넘어서 호르몬 조절이 안 되는 몇몇 나이 든 선배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재미있는 환송문일 경우에는 괜히 묘한 분위기를 깨보려 30여명이나 되는 특파원들이 억지웃음을 웃어댄다. 무미건조형은 그냥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고 환송회 자리의 감동이 파괴된다.
    나는 재미와 감동을 섞어 환송패 문구를 지었는데 그 뒤로 괜히 환송패 주문만 엄청 들어오고 귀찮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환송문 낭독이 끝나면, 답사가 이어진다. 보통은 받은 대로 돌려준다. 뭐 말은 잘하는 사람들이라 미리 준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감동에는 감동, 재미에는 재미, 무미건조에는 무미건조한 답사가 이어진다.
    환송문이 어떤 컨셉이든 마음은 다 한 가지다.
    먼저 귀임하는 자에 대한 축하와 축복, 그리고 남겨진 자에 대한 떠나는 자의 우려와 축복이다.
    1차가 끝나면 귀임자가 마련한 2, 3차 자리가 이어진다.
    어제 나는 별도의 환송회가 있어 1차를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별도의 환송회를 위해 나와 P선배가 만난 이 친구는 싱가포르 화교 출신인데 베이징에 온 뒤 현장에서 자꾸 마주치며 친해졌다. 앞서 온 한국 특파원들과도 좀 친분이 있던 친구라 쉽게 가까워졌다.
    처음 만난 것이 지난해 5월 제1회 일대일로 포럼이었는데 첫인상이 웃는 표정이 선하고, 예의가 바른 친구였다. 그 뒤로 19차 당대회, 문재인 대통령 방중,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한국대사관 행사 등등에서 함께 일했고, 이 친구가 한식을 좋아하는 덕에 개별적으로 소그룹 모임도 자주 가졌다.
    밤 9시가 다 돼서 시작된 술자리. 이제는 마지막이 될 술자리에 마주앉았을 때 한국 특파원들을 보내는 것과는 또 다른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L기자와 나, 또 이 친구를 소개해 준 P선배는 중국에서 고생했던 추억을 방울방울 떠올리며, L기자의 3년간의 베이징 생활을 함께 직물 짜듯 짜내려 갔다.
    그 친구가 날줄을 놓으면, 우리가 씨줄을 끼워 넣고, 조금 틀린 부분은 서로 고쳐 잡아주며 기자들 특유의 기억력으로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3년간의 추억을 모두 되새겼다.
    그러다가 '쩐커시'(真可惜·정말 아쉽다)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자. L기자는 눈시울을 붉혔다.
    냉혈한인 기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굉장히 당황하는데 P선배와 나도 애써 외면하면서 그의 눈물을 모른척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도, 선배도 언젠간 저런 기분을 느끼겠구나. 하면서 고생한 그에게 준비해간 선물을 전달하고, 한국에 자주 오는 친구이니 한국에서 보자는 말을 건넸다. 또 말레이시아에 사는 누나네 집에 갈 때 꼭 싱가포르에 들르겠노라 기약 없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한국 소주를 글라스 채로 마시는 이 친구도 한국은 1년에 한 번씩 가니 반드시 서울에서 고주망태가 되자면서, 말레이시아에 오면 반드시 싱가포르에 와달라는 말로 화답했다.
    그리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날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이별을 고할 때가 왔다고 암묵적인 합의를 본 뒤 P선배가 이미 우리 몰래 계산을 마친 술자리를 정리했다.
    L기자가 휴대전화 앱으로 택시를 부른 사이 술자리 주변에 잠시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택시 도착 알림을 보고 도롯가로 나갔다. 저 멀리 오던 택시가 우리 앞에 세워졌을 때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셋이 얼싸 안고,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남겨진 자가 떠나는 자에게 전하는 '축하와 축복'의 포옹과 떠나는 자가 남겨진 자에게 전하는 '우려와 축복'의 포옹은 택시 기사가 '빵' 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됐다.
    린즈헝 잘 가고, 거기서도 건강해. 데스크랑 그만 싸우고. 하하하하.
    '不见不散'
#단상 #귀임 #베이징 #특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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