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우리 아빠는 정말 한량이다. 나쁜 한량 말고 좀 좋은 한량이다.
어제 아이들에 대한 글을 쓴 뒤 문득 아들과 아빠, 울아빠와 나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빠는 4남매 중에 장남. 1살부터 26살 장가를 가기 전까지는 할머니 밑에서 애지중지 컸다.
그 시절 고딩 때도 소고기 장조림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서 다녔다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외모를 보자면 곧 70이 다 돼 가는 데 조금 젊게 보면 50대 후반처럼 보인다. 키도 나보다 좀 크고 체형도 드시는 양이 엄청난 대도 날씬하다.(그 유전자 어디 갔나)
샌님 같이 생겼는데 고1 때는 싸움을 해서 학교를 일년 꿇기도 하고, 그 참에 읍내 사진관에서 무려 프로필 사진을 찍어 연예인이 되겠다고 상경까지 했던 독특한 학생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 나오는 이병헌처럼 멋쟁이 선생님 같고, 식구들 특히 엄마가 보기에는 소설 '화랑의 후예'에 나오는 황진사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약간 경제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댕댕이, 병아리, 고양이 같은 짐승과 자식들을 무척 예뻐했다. 그럴 때 보면 천성이 좀 착한 사람인 거 같기도 하다. 아가처럼 순수한 악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마인부우 같은 캐릭터랄까)
아무튼, 그 시대에는 드물게 친구 같은 아빠였는데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애 숙제는 안 시키고 무조건 딱지치기, 연날리기, 구슬치기, 개구리 잡기, 메뚜기 잡아 구워 먹기, 나무에 글터 매달려 있기 뭐 이런 것을 해주면서 놀아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아준 건지 그냥 논 건지 구분이 잘 안 간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나무에 글터 매달리기다.
우리 집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임대아파트로 이사하기 전까지 다가구 주택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셋방은 매우 더웠는데 학교에 갔다 와서 내가 덥다고 투덜대면 아빠가 등목도 시켜주고, 그래도 덥다고 하면 집 앞 신작로(산업도로) 건너편에 있는 언덕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 하나 아빠 하나 굽은 소나무 기둥에 올라타서 나무를 껴안고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늘어져 있곤 했다.
이렇게 하면 나무 수액이 돌면서 몸이 시원해지는 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해보길 권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피서법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토란 잎이던가 집 담 근처에 난 넓적한 잎을 꺾어서 누나랑 나랑 같이 처마 밑에서 비를 바치고 있다가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던 거 같다.
아빠 인생의 중반부는 엄마와의 결혼생활이다. 26살~60살까지 정도인데 요 시기에 아빠는 할머니의 품을 떠나 엄마한테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았다. IMF가 터지기 전에는 시골 논을 팔아 조그만 귀금속 공장도 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 1년도 못 가서 그 공장 자리에 건강원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아 시원하게 말아 드신 것 같다.
아빠는 아까도 말했지만, 숫기가 없다.
내 기억으로 슈퍼를 포함해 옷가게, 신발가게 등 아빠가 돈을 내고 물건을 산 적이 거의 없다. 주동적으로 직접 물건을 사기 시작한 것은 요양차 목포에 내려갈 때쯤인 것 같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냥 뭐 주인한테 이것저것 보여달라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사다 주면 입고, 아니면 말고 그런 거지"라고 답해서 굉장히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인생 후반부인 60세 이후에는 내가 취직을 한 뒤여서 엄마보다는 나한테 의지를 많이 하고 살아가고 계시다. 결국,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울타리 안에서 아빠는 아주 한량처럼 즐겁게 잘 살고 계신다.
그래도 절대 도박이나 술을 과하게 마시거나 바람을 피운 적은 없다. 그저 집을 사랑하는 집돌이 같은 분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빠가 참으로 순수하고, 다정하고, 친구 같은 좋은 아빠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초딩 아들이 집에 왔을 때 아빠가 집에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럼 돈을 누가 버는 건가.
가세가 하루가 멀다하고 기울어도 아빠는 주로 집에 계셨다. 엄마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는 저 당당함이란 바로 21세기 진정한 한량의 모습 아닌가.
사춘기 때는 가끔 아빠가 밉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아빠의 존재 자체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사회에 나와서도 어른들께 스스럼없이 대하고 웬만한 사람과도 잘 어울리는 것은 모두 아빠 덕분이다. 나는 아빠처럼 어른으로서 권위가 없고 독특한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아빠는 내가 취직을 한 뒤 갑자기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셨다. 처음에는 하다 말겠지 했는데 웬걸 장학금도 타시고, 졸업할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다. 지금은 몸이 안 좋아 목포에서 주역 공부를 하시면서 풍산개를 키우신다. 진짜 독특한 캐릭터이신 게 외국 사는 손주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셔도 아침에 전주로 오셨다가 저녁이면 쿨하게 다시 목포로 내려가신다. 이유는 목포서 키우는 풍산개 두 마리가 산책을 안 시키면 똥을 안 싸기 때문이란다. 이런 장면이 눈앞에 연출되면 엄마의 분노 게이지는 저 하늘 높이 치솟는다.
나는 그래도 순수한 아빠가 좋다. 저렇게 풍류를 즐기며 사는 것도 어찌 보면 본인이 타고난 복 아니겠나.
한량 같은 삶을 살면서도 매번 병치레하는 아빠를 향해 고까운 시선을 보내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울엄마. 다음 단상 시리즈는 바로 '한량 아빠와 그걸 지켜보는 울엄마에 대한 단상' 울엄마 이야기를 써야겠다.
#단상 #울아빠 #20세기진정한한량 #권위0 #엄마속터진다 #그래도잘키워줘서고마웡~
++와 근데 기억조작이란. 곧통을 걷어내니 아름다운 추억만 남는구나. 이래서 식구식구 하는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