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을 보면 난 Trouble maker~ "
187cm의 훤칠한 키, 왁스 칠을 해서 다듬은 머리, 짙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뇌쇄적 눈빛으로 좌중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옆엔 165cm의 아담한 체형, 갈색 염색을 해서 적절하게 단정한 머리....
작은 체형의 남자가 현아처럼 팔을 뻗는다.
훤칠한 키의 남자가 장현승처럼 얼굴을 작은 체형의 남자의 팔에 가져다 댄다. 그러다 둘의 얼굴이 서로 마주치고 둘의 입술이 거의 부딪힐 뻔한다. 둘은 재빨리 몸을 합친다. 박명수 정준하의 불장난 댄스를 추면서 마무리한다.
강의실 안 여기저기에서 '으윽', '아아악', '깔깔'하는 불편한 웃음소리들이 나온다.
더럽지만 성공이다. 경상도가 고향이라던 두 명의 친구는 trouble maker을 선보이고 자리에 가서 앉는다.
한의대에 입학 후 갖는 새내기 배움터 장기자랑 시간. 원형의 계단식 강의실 안은 선배들과 동기들로 가득 차있다. 난방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공기는 차갑지만 선배들은 궁금증으로, 새내기들은 긴장감으로 상기되어 있어 다들 춥다는 생각은 안 하는 듯하다.
그다음으로 생글생글 눈웃음이 멋진 남자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는다.
"안녕하세요. XXX입니다"
나는 평생 경상도에서 억양 있고 투박한 말투만을 들어왔는데, 저런 부드러운 목소리의 말투 억양은 처음 들어봤다. 마치 내가 이때까지 먹어본 아이스크림의 세계가 비비빅이었다면. 이 친구의 목소리는 하겐다즈 다크 초콜릿과 같은 맛이랄까.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우와 목소리 좋다' 하는 여자 선배들의 말이 웅성 웅성 들려온다.
sky대학 공대에서 밴드 동아리 메인보컬로 활동하다가 왔다던 그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해 줘요. 사~랑 해줘요~.."
하동균의 노래를 열창을 하고 선배들의 우렁찬 박수소리가 강의실 안에 울려 퍼진다.
몇 사람이 더 지나가고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온다. 초조함에 다리를 떨고 내가 노래 부를 가사의 쪽지를 살펴본다.
바로 내 앞 차례 얼핏 10살쯤 더 많아 보이는 OB 형들은 장기자랑 준비 한 게 없어서 죄송하다고. 소주잔에 소주를 담아 2~3잔 연거푸 마신다.
오히려 그 깡마저도 멋있게 보인다.
드디어 내 차례.
원형 강의실 앞으로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간다. 강의실 계단의 층계는 무척이나 크다. 차라리 넘어지는 게 더 웃기려나? 아니 넘어져서 발목을 삐어서 이 장기자랑을 피할 수 만 있다면.. 하는 생각이 겹치는 사이 내 튼튼한 두 다리는 강의대 앞에 나를 무사히 잘 데려다 놓았다.
원형 강의실 위층에서 나를 보고 있는 여러 선배들의 눈, 동기들의 눈이 보인다. 아니 얼굴이 익숙지 않은 터라 누가 선배고, 동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수 십 명의 눈과 귀는 내 얼굴과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심장은 더없이 쿵쾅댄다. 이 정도 심장 박동이면 자동차 엔진에 넣어도 아마 잘 뛰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주머니에 종이를 꺼내어 내가 개사한 가사들을 점검한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뗀다.
"정.. 주.. 나요~ 안 정... 주... 나요~~.. 늘 정 주는 날 알아줘~.."
목 젖에 전기면도기를 들이댄 듯 떨린다.
강의실 저 뒤편에서 한 선배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안 들린다. 목소리 크게~!"
"내 눈 속에 선배들 밖에 없어~.. 선배들 믿고 여기까지 왔지..."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이어 나간다. 준비한 율동이 있어 양팔을 들어 왼쪽으로 움직인다. 아뿔싸 율동을 하니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가고 옹알이 수준이 된다.
"음........ 음........... 음........... 정........... 주.......... 나요......."
심장이 두근거려 튀어나올 것만 같다. 목 뒤에서부터 등 뒤까지 땀이 흥건해 내 옷의 감촉이 다 느껴진다. 눈앞이 깜깜하다.
"그냥 들어가~!"
목소리가 안 들린다던 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강의실 내 자리에 앉아있다. 꿈을 꾼 것일까? 힘껏 쥐고 있던 양손을 펼쳐본다. 개사 한 종이를 꽉 부여잡느라 완전히 구겨져 있었고, 땀에 젖어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한의대에 입학하고 나서 초반의 기억은 주로 이런 기억이다. 군데군데 영화 속 장면들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밤에 잘 때 이불킥 하기 딱 좋은 기억들이다.
한의대에 입학하기 전 부푼 꿈과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교대를 다니며 끼어 있는 생활을 했기에 여기서 만큼은 제대로 생활하려 했다. '내 뼈를 묻을 곳은 바로 여기다.'라는 각오로 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과생활도 열심히 해서 선배들에게 사랑받으리라.
거대한 착각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이 앉아서 공부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담이 화려한 것도 아니었으며, 술도 잘 못 먹었고, 춤을 잘 추지도 못했고, 노래도 잘 부르지 못했으며, 수려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재미가 없었다. 특출 나게 잘하는 것이 없는 후배는 선배들에게 잊히기 마련이었다.
3월 들뜬 분위기가 지나자 재미없는 새내기들은 부름을 받지 못했고, 재미있고 재능 있는 새내기들은 선배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다.
더 나아가 이제는 경제적인 수준의 차이도 쉽게 보였다. 아버지가 한의사여서 물려받을 한의원이 있는 친구도 있었고, 부모님이 둘 다 의사인 경우도 있었고, 아버지가 증권가에서 일해서 도쿄에 집이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한의대에 오기 전 학원을 하면서 본인이 돈을 많이 벌어 차를 몰고 온 형도 있었다. 그들의 근거 있는 단단한 자신감은 내면과 외면에서 모두 드러나고 있었다.
성적 하나만 믿고 한의대에 가는 것만을 믿고 내 존재 가치를 삼았던 나였는데, 한의대에 입학해서 성적 이외의 것들을 비교해 보니 모든 것들이 평범했고 특출 날 게 하나도 없는 나였다.
이때의 나는 참으로 남들과 비교를 많이 했다. 얘는 이것을 잘한다. 얘는 이것이 좋다. 얘는 이게 있어서 부럽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쓰면서 원했던 한의대였지만 입학하고 나서 도리어 더 괴로웠다.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는 '나'를 발견해서 더욱 괴로웠다.
나에 대한 스스로의 소통이 부정적이게 되면, 대부분이 나보다 나은 사람들처럼 보이기에 남들을 지나치게 치켜세우게 된다. 그들의 눈을 중시하게 된다. 결국 타인의 판단과 시선이 나의 중심에 된다.
'남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했다.
술자리에서 내 말로 동기나 선배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치면 다음날 장문의 카톡을 보냈었다. 고민고민을 하면서 카톡을 보냈던 나날들. 정작 선배들과 친구들은 그런 말을 들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예과 1학년을 정리하자면 설렘으로 정신이 없다가, 흐릿해지고, 부끄러웠다가 스르륵 사라진다.
기억의 종이가 뜯겨 나가 있고, 알록달록 색칠해지다가 거대한 검은색이 알록달록한 부분들을 덮는다. 가장자리와 몇 군데에선 쥐가 먹은 듯 듬성듬성 파여있다.
간절히 원하던 한의대에 입학했지만 나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고뇌 끝에 내 나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