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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풀 Mar 12. 2024

57등 중에 55등을 했다.

이 글은 나의  부끄러운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없애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이 올라오는데, 여기까지만 읽고 뒤로 가기를 누르셔도 좋다.


내 부끄러운 기억을 함께 하실 독자분들은 밑으로 스크롤바를 내려보시길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법륜스님의 말을 듣고 애매하게 마음공부를 한 나는 이상하게 괴로움이 더 심해졌다.


가까스로 인턴 업무를 마치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내가 공중보건의를 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공중보건의 : (병역의무 대신 3년 동안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공중보건 업무에 종사하는 의사.)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내 몸과 마음에 쉴 곳이 필요했다.


도망쳐 나오듯 공중보건의에 바로 지원을 했고 눈을 떠보니 딸기 냄새가 가득한 논산훈련소 앞에서 수 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빡빡머리로 서 있었다.


그 전의 인턴생활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대부분이 별로였다고 하는 훈련소생활이 나는 좋았다.


잘 시간이 보장되고 세끼 밥을 제때 주고, 운동시켜 주는 것이 오히려 감사했다. 4주간의 생활은 꽤나 재미있었고 훈련소 동기들도 잘 지냈다.


훈련소 생활을 건강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고, 마음도 살찌고 마음의 괴로움도 덜어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긴장감도 남아있었는데, 바로 내 3년의 인생을 좌우할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떠나 도서산간(島嶼山間) 지역을 다니다 보면 간간이 보이는 보건소, 보건지소 건물을 볼 수 있다.


혹시 궁금한 적이 없었는가?


여기에 있는 젊은 의료인들은 어떻게 해서 이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지?


도서산간 지역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도시와 조금이라도 근접한 곳의 근무지를 원한다.


그러면 이 많은 지역의 보건지소에 사람들을 어떻게 고르게 배치할까?


간단하다. 모든 게 '운'이다.


각각의 공중보건의 들은 임의로 숫자를 배치받는다 (이를 난수번호라 한다.) 난수번호는 본인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하는 '도'에 지망을 한다. 1 지망 ~5 지망까지 써넣는데 1 지망에서 난수번호가 높은 사람들이 원하는 지역에 가게 되고, 1 지망에서 떨어지면 거의 대부분 전라남도로 가게 된다.


이후 본인이 선택한 도의 도청으로 전부 모이게 된다. 그 도청에서 로또 추첨볼 뽑듯이 뽑는다. 속을 알 수 없는 상자 안에 손을 짚어놓고 종이를 짚으면 된다. 그리고 그 종이에 적힌 숫자가 자신의 등수이며 그 등수대로 '도'안에서 원하는 지역을 갈 수 있게 된다. 이때의 뽑는 순서는 난수 번호가 제일 앞의 사람부터 시작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뺑뺑이 돌린 곳에서 무작위로 종이를 뽑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운'으로 정해진다.


나는 고향이 대구였으므로, 경상북도를 넣었는데, 다행히 1 지망으로 쓴 원하는 '도'는 선택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남은 것은 경상북도에서 어떤 도시를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상북도는 생각보다 넓었고 참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내가 있는 것은 1등에서 마지막등수까지 나왔을 때 우선순위를 매겨놓았었다.


우선순위는 정해놓았지만,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인생이 걸렸다고 생각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부모님도 덩달아 조바심이 났고, 건너 건너 용하다는 점집을 알아내게 된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그런 곳에 가지 않았겠으나.. 오로지 '운'이라는 영역이었기에, 한 번 가보지 않을래?라는 부모님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대구 번화가에 위치한 점집은, 알아야지만 찾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

옆의 음식점, 옷가게들의 간판이 크게 있었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야지 '사주, 명리'라고 적힌 작은 핑크빛 간판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단독주택 대문을 열고, 2층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문으로 들어가자 약간의 서늘함과, 불상, 향초, 정체를 수 없는 여러 나라 국적의 신을 모시는 장식품들이 있었다.  


사주 운세를 봐주시는 분이 내 상황을 다 듣고 난 뒤에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일시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간 책을 보고 흰 노트에 여러 한자들을 흘려 쓰며 끄적였다. 검은색 잉크가 튀며 흰 종이에 점을 흩뿌렸다.

그리고 난 뒤에 천천히 말을 했다.


"전반적으로 3년 동안 풀리겠는데, 운이 좋네요 다만 산속, 바닷가나 섬에서 책을 팔자네요"

"그리고 경상북도 갈 지역 중에  ㅇ과 ㅎ이 들어간 곳에 가겠네요"

"뽑기를 하는 날에 나쁘지 않은데 좋게 하려고 하면 빨간색 옷을 입고 가세요"



공중보건의로 가는 지역들은 어차피 산속, 바닷가, 섬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말에, 나는 속는 셈 믿어보기로 한다. 내 옷장에서 빨간색 라코스테 야구점퍼를 꺼내 입었다.






경상북도 도청은 안동에 위치했는데, 규모가 컸다. 건물들의 지붕은 기와집 형태로 만들어 있어서, 현대식 경복궁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4월의 포근한 날씨에 푸르스름 해지는 잔디를 보며 기분이 좋았다.


대 강당엔 수백 명의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이 각자 노트북, 휴대폰을 보면서 본인의 정리파일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고향이 경주일 수도 있었고, 포항일 수도 있을 터였다. 또 누군가에겐 서울로 가까이 갈 수 있는 KTX가 있는 정차역이 1순위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등수가 낮게 나와도 우선순위만 정해져 있다면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나도 1등부터 57등까지 적힌 순위를 보며 초조하게 뽑기를 할 순서를 기다렸다.


앞에선 경상북도 보건정책 관리장이 나와서 공중보건의가 가져야 할 자세라든가 업무 등의 주의사항에 대해서 알려주고 계셨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긴장 때문에 몸이 꼬이고 소변이 마렵다. 대변이 마려운 것 같기도 하다. 입이 바싹 말라서 물을 자꾸 마신다. 긴장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조금 참아본다.


옆의 사람들은 어디 지역이 좋다, 나쁘다, KTX역이 신설된다. 말을 나누고 있다. 듣는 척하지만 말들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제 드디어 모든 일정이 마치고, 배치를 할 시간이 다가온다고 한다. 직원 몇 명이 속을 알 수 없는 박스를 가져오고, 거기에 골고루 자른 종이를 넣고 쓱 쓱 휘젓는다.


종이를 보고 있으니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나와 같은 사람이 많나 보다, 머리가 잔디처럼 솟아오른 사람들이 이리저리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다시 대강당에 들어가니 웅성 웅성대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뭐야 왜 진행이 안되는 거야?'


나도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그런데 공무원 직원분이  피를 토하며 크게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바로 내 이름이다. 빨간색 라코스테 옷에 물 묻은 손을 닦으며 허겁지겁 앞으로 나간다.


 "선생님이 어디 가셨었어요. 선생님이 1번으로 뽑습니다."


 내가 1번이라고??... 마음의 준비도 안되었는데, 이렇게 뽑는 것이었나? 그리고 내가 난수 번호 앞자리였어?

 

 "얼른 뽑으세요."


 이게 맞나? 손을 넣어 종이의 감촉을 느껴본다. 맨 처음의 것은 왠지 느낌이 아닌 것 같다. 우측으로 휘두르다가 하나가 잡힌다. 심장이 뛴다. 여기에 내 3년의 운명이 달려 있다. 결과는?



57등 중에 55등이다.



 다시 일어나 통 안을 들여다본다. 맨 처음에 잡으려던 것은 46등이다. '아 저거라도 뽑을걸..'


옆의 선생님이 제지한다.

 

"선생님 그러시면 안 돼요, 통 보지 마세요 다시 못 뽑아요."


풀썩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옆의 직원은 익숙하다는 듯 나를 부축하고 볼펜을 쥐어준다.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게 한다. 등을 몇 번 토닥인다. 그리고 자신의 명부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다.


정말 이게 끝인가?


내가 열심히 조사했던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뒤에서 3등이었으므로 앞에서 조사한 우선순위 같은 건 전부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선택할 것은 울진이냐 울릉도냐 하는 것이었다.


 1등부터 57등까지 순서가 정해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1등부터 본인이 원하는 지역에 이름을 써넣는다.


거의 모든 공간이 채워지고 난 다음에야 나는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나고 내 앞에 서 나에게 허락해 준 여백은 울진, 울릉도뿐이었다. 


울릉도는 다음날 9시까지 바로 섬으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못하겠다는 생각에, 울진에 내 이름을 휘갈겨 써넣는다.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내 인생에서 하나의 기억을 바꿀 수 있다면 이 기억을 없애고 싶다.


 경상북도 도청을 나오며 택시를 잡는다. 안동 터미널까지 가는 거리가 꽤나 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오늘의 결과를 이야기하며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한다.


  57등 중에 55등을 뽑았으며, 그 명리학자는 돌팔이이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나는 빨간색 옷을 입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사람 때문에 빨간색 옷을 입어서 망친 거라고 짜증을 낸다.  


 그리고 어머니가 괜히 사주팔자를 보자고 한 것 때문에 내 3년의 인생이 망친 거라며 악담을 퍼붓는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는 말 밖에 하지 않는다. 나는 속이 풀리지 않으니 말을 더 듣지 않고 전화를 팍 끊는다.



공중보건의를 가겠다고 선택한 것도 나였고,

공중보건의에서 경상북도를 지망한 것도 나였고,

사주 명리를 보러 가자 한 것에 동의한 것도 나였고,

공중보건의에서 57등 중에서 55등을 뽑은 것도 다름 아닌 내 손이었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했지만 나는 남 탓으로 끊임없이 돌리고 있었고,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인턴에서 괴로움이 지속되었고, 도망치듯 떠나려 한 공중보건의의 시작에서도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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