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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Feb 05. 2022

34. 시(詩)가 눈에 들어왔다

- 기형도 시인의 ‘빈집’

대학 시절 시와 관련한 동아리에 잠시 몸담은 적이 있었다. 자연과학 전공자였던 내가 문학동아리에서 느낀 건 내가 알고 있는 세상과 그 너머 있는 세상의 간극이 화성과 금성 못지않게 멀다는 거였다. 그 생경함 때문에 더 끌렸던 그 세계와 나의 인연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시를 오래 품어온 동기와 선배들의 삶은,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만 열여덟 살의) 내가 읽어내기엔 너무 버거웠다. 그렇게 시는, 시 세상은 내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졸업을 했다.

    

그때만 해도 취직이 어려운 시절은 아니어서 전공을 살려 영양사로도 일하고, 먼 길을 돌아 내가 하고 싶었던 지금의 일을 하던 중 IMF를 겪었다. 나고 자란 곳에선 더 이상 나를 위한 일자리는 없는 듯했다. 겁 많던 내가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한 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20년 넘게 같은 일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지쳐 나가떨어지기도 하며 세상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고단함을 감출 수 없는 낯선 얼굴의 50대가 거울 속에 있었다.   

  

그 어떤 열망도 끝은 있게 마련이듯 그 바쁜 시절은 휴직으로 ‘일시 중지’됐다. 부모님의 와병과 내 건강의 적신호로 인한 거였지만 휴직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인지 마음은 여전히 바빴다. 다양한 진료과 예약이 줄을 서 있고, 그 사이사이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 댁을 들러야 했다. 그러다 맞은 설 연휴, 시댁에 한 주 먼저 다녀온 데다 출근 부담이 없어지자 온몸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아우성이 아주 가끔 잠잠해지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회사에서 정리해 온 짐 더미 속에서 삐져나와 있어 우연히 집어 든 책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 전문>


그랬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붙잡고 있느라 힘들었던 어제의 내가 보였다. 움켜쥔 손에서 힘을 빼자 내 것이 아닌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빠져나갔다. 사라져 가는 것이 꼭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내 것이 아니었던 열망들이 알려준다. 참 내게 친절한 열망들, 그 열망을 보내고 얻은 건 그만큼의 여유였다.


기형도 시인에게 전하고 싶다. 빈집에 사랑이 갇힌 게 아니라 사랑이 빈집을 채운 것일 수도 있지 않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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