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Feb 20. 2022

36. 어깨를 토닥여준 시(詩)

-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몸과 마음속에선 세상사의 시계가 멈춰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고, 내 빈틈을 메우느라 회사 후배들과 가족들이 애쓰고 인내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많은 세상 사람이 경험하는 부모님 와병에 따른 간병과 돌봄을 마치 나만 겪는 일인 듯 고통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내가 받고 누리는 것들에 대한 감사는 까맣게 잊은 채 한 해를 흘려보냈다.     

 

미련이 담벼락을 뚫을 즈음이었던 12월의 어느 주말 남편을 따라나섰던 카페 탐방에서 첫눈 오는 장면을 마주했다. 때마침 왼쪽으론 절집, 오른쪽으론 멀리 한강이 보이는 카페의 큰 창 앞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뒤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얼룩을 지우듯 함박눈이 쏟아지는 장관을 마주하는 순간, 땅과 하늘 사이에 나와 함박눈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여행 친구 ‘로마’의 톡을 받았다.     

 

‘로마’는 10여 년 전 내가 처음으로 가족에서 분리돼 혼자 떠난(패키지이긴 했지만) 인도 여행에서 만난 여행 친구였다.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는 나와 달리 로마는 세상 어떤 일도 유머와 재치로 해석하는 타고난 낙천가에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자였다. 성향상 나와는 대척점에 있을 법한 로마, 그녀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조용히 식사만 하던 다른 여행객들과 달리 로마와 동행이 돼 인도 곳곳을 다니며 우린 서로 강렬한 끌림을 경험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둘도 없는 여행 친구가 된 우리는 배낭을 메고 전국 곳곳을 다녔다.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서로의 삶을 나누기도 하고 각자의 도시(대구와 서울)로 돌아간 뒤엔 메일로 우정을 나누곤 했다.      


올겨울 첫 함박눈의 장관을 보던 중 받은 “서울에 첫눈 온다는 뉴스 보다가 갑자기 Jasmine 생각이 났어요”라는 로마의 톡엔 나에 대한 염려가 스며 있었다. 눈앞의 함박눈과 로마의 그 문장은 오래 웅크린 채 주저앉아 있던 내게 “이제 그만 울고 일어나라”는 메시지 같았다. 그때 로마에게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톡을 보냈다. 나 자신을 보살피는 게 급선무라는 걸 로마는 진작 알고 있었던 듯 바로 답이 왔다. “잘 결정했어요. (회사 다니느라) 그동안 참 고생했고 수고했어요”라는 로마의 말에 울컥 눈물이 났다.

    

부모님 돌봄과 하루 12시간의 직장생활은 병행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나를 병들게 한 건 불행도, 고통도 아닌 내 욕심이었다. 그 욕심이 불행을 재촉했다는 자각이 들면서 정신이 들었다. 타고난 약골인 내가 두 가지를 모두 잘해보려고 한 게 무리수였다. 일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 빈자리는 유능한 후배가 빈틈없이 메울 터였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돌덩이가 얹힌 듯하던 가슴팍이 뚫리는 듯했다. 한 번에 하나씩만 해나가자. 22년 한 해는 나 자신과 부모님을 돌보는 해로 삼기로 했다.     


3월을 열흘 남겨놓은 토요일 다시 안산 둘레길을 찾았다. 오전에 잔뜩 흐렸던 하늘이 개는 듯했는데 걸은 지 1시간쯤 지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설(瑞雪)로 느껴지던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일을 그만두고 이 병원, 저 병원 순례하듯 다니는 사이사이 아버지를 돌보는 나를 저 위의 누군가가 함박눈으로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세 좋게 내리는 눈 속에서 아이처럼 신이 나 사진을 찍느라 마스크가 흙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되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사진을 찍던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게 있었다. 여리고 앙상한 가지에 분홍빛 머금은 콩알만 한 꽃망울이 총총히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꽃망울이 함박눈 속에서도 봄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시 전문>     


모든 존재는 누군가의 애끓는 마음 덕에 실재한다는 깨달음. 꽃 필 차례가 내 앞에 있는데 한껏 웅크린 채 땅속인지 바닷속인지 모를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니…. 김종해 시인이 어리석은 나를 ‘그대’로 칭하며 순하디 순한 어조로 다독이듯 알려준다. 후회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할 만큼 했으니 바로 내 앞에 다가온 봄날을 봄날인 줄도 모르고 놓치진 말라고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