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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ug 18. 2023

70. 귀한 손님

―숨바꼭질은 이제 그만

열아홉에 놓친 시를 다시 찾아 나선 요즘엔 사는 게 숨바꼭질의 연속 같다. 엄마가 병원에 들어가신 지 어느덧 2년 6개월이 지났다. 세월이 약인지 이제는 면회 가서 눈물 없이 엄마에게 죽을 떠먹인다. 1시간 동안 겨우 반 그릇을 먹였을 뿐인데 급허기진 배를 채우려 서둘러 병원을 나와 행주산성 맛집으로 달려간다. 한 주는 엄마 병원으로, 다음 한 주는 아버지 요양원으로 면회를 다닌다. 뭐든 익숙해지면 타성에 빠지는 걸까. 시는 여전히 곁을 줄 기미가 없다.

      

일상이 끝나가는 밤이면 책상 앞에 앉는다. 어김없이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낮 동안 내 가슴과 머리 사이를 유영하던 시구(詩句)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머릿속엔 깜깜한 밤하늘이 펼쳐질 뿐이다. 내 것인 게 분명한 머리조차도 내 것 같지 않은 날들. 일상의 것을 낯설게 보려고 할 땐 되지 않더니 어떨 땐 절로 익숙한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그렇다. 시간은 항상 나를 앞서가면서 놀리는 것만 같다. 아직도 마음은 부산하고 노트북을 펼치기만 하면 목이 타기 시작한다. 오래돼 연비 확 떨어진 우리 집 자동차 같다. 메모하지 않아도 이쯤이야 기억하지, 했던 게 자만이었을까. 사소한 것도 막상 써야 할 순간엔 연기처럼 사라진다. 시가 나를 술래 삼아 숨바꼭질하는 것만 같다.


아침부터 햇살이 뜨겁게 타오르던 어느 날, 종로도서관을 오를 때였다. 한때 고전 수업을 듣느라 매주 금요일 저녁 4년 넘게 드나들었던 곳인데 아침에 오긴 처음이었다. 그리 까마득한 계단도 아닌데 그날따라 유난히 숨이 가빴다. 나는 왜 시 뒤꽁무니를 이리도 간절히 쫓아다니는 걸까.

      

열아홉 때 시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시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동기와 풋사랑이 시작됐다. 하나에만 매달려도 될까 말까인데 두 가지를 모두 품기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맏딸의 일상을 100% 공유하던 엄마에게 새내기 딸의 이성교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의 완강한 반대에 굴복한 나는 결국 동아리를 탈퇴해야 했다. 시도, 풋사랑도 어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제발로 도망치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바보라 불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시를 잊고 바쁘게 살았다.  

    

엄마가 쓰러지면서 나 또한 무릎이 꺾일 만큼 고통을 겪었다. 결국 회사도 그만둬야 했다. 지난 2년 6개월은 엄마에게도, 내게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이제 엄마는 면회가 자유로운 요양병원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이 바로 내게 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시가 주는 충만한 순간을 누리고 싶다.           


            손    님     

                                 Jasmine     


시집 든 가방 메고

언덕배기 도서관 오르는 길   

  

수없이 올랐어도

계단 앞에선 여전히 숨 가쁘다     


시를 쓰는 일도

사람 노릇도

다르지 않다  

   

웅숭깊은 글 읽으니

제대로 살고 싶어지고

잘 익은 시 읽으니

시 쓰고 싶은 날     


오래오래 시집 품으면

가슴 파고드는 시구 하나쯤

찾아오려나 했는데

애태우는 날만 수북하다     


계단 끄트머리 즈음

바람처럼 스쳐 가는 시 한 줄

귀한 손님 붙잡듯

허둥대는 여름날     


멀어지는 시의 뒤태는

열아홉 그때처럼 까마득하고

기미 얼룩진 얼굴엔

햇살이 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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