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칼의 노래>
예전에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칼의 노래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깊이와 책 속에 쓰인 문장들이 낯설어서였다.
쉽게 읽히지 않았다. 가방에 넣어가지고 덜렁덜렁 다니다가 도서관 반납 기일에 맞추어 첫 페이지만 넘긴 채 고스란히 떠나보냈었다.
다시 읽기까지는 시간이 꽤 지났다. 몇 년 정도 지나서 다시 읽게 된 셈이다.
그동안 내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사에서의 직급도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을 더 만났고 조그마한 영광과 좌절을 교차로 맛보았다.
이제는 책 속 문장이 읽히기 시작했다. 물론 쉽게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문장의 깊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실이 쉽게 머릿속에 정립이 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는 보였다.
영화 명량을 봤을 때 다른 장면들보다도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이순신이 꿈속에 나타난 죽은 부하들의 모습을 보고 "술 한 잔 받으시게..."라고 말하며 불안한 눈동자와 떨리는 손으로 술을 권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성웅 이순신의 모습만을 기대했던 내게는 가장 충격적이었고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가장 인상 깊은 한 장면으로 남았다.
칼의 노래에 담긴 이순신의 내면을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위의 장면이 적합하지 않는가 싶다.
칼의 노래는 백의종군하던 시점부터 전사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이순신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고 있다.
작가가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썼지만 픽션을 가미했기에 역사적 인물인 이순신 위에 김훈 작가의 생각을 덧댄 소설이라고 보는 게 적합할 듯싶다. 어쩌면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빌려 작가의 생각을 여실히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칼은 '징징징' 뼛속의 심연에서부터 울어댄다.
잘려나간 적군의 목들과, 피로 물든 바다와, 품은 여인 여진의 몸 냄새와, 어린 면의 젖 냄새와, 임금의 해소 기침 소리와, 전쟁터의 화약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칼의 울음소리는 더욱 깊이 울어댄다. '징징징' 울어대는 칼의 울음소리 하나로 한 사람의 내면을 이토록 잘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동인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397P'
인간 이순신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인 조선의 현실 앞에서 이 절망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명의 운명과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으로 암흑 같은 절망과 부딪치고 있다. 자신에게 의무를 다한 부하들의 죽음에 미안한 마음과 적군에게 칼로 베어져 죽음을 당한 아들이 꿈에 나왔을 때조차도 냉정하게 돌려보내야 하는 처지와 정치세력의 무능 앞에서도 그 분노를 결국은 적에게 향해야 하는 심정, 그 절망과 분노의 깊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감정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줄곧 적들로 뺏은 이 군량미가 백성들이 지은 곡식을 수탈당한 것임을 자각하면서 먹는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왕과 정치세력들이 하지 않는 고뇌의 책임을 오롯이 그가 떠안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지휘자로서의 양심이 어깨를 짓누르고 피로감을 준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에 다다라서야 내 마음도 편해졌다.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며 독백을 하는 장면에서 지독한 운명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순신을 휘감았던 무거운 운명의 쇠사슬이 스르르 벗겨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그는 드디어 고요를 맛본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 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3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