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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Oct 05. 2024

해 뜨는 서울

아픈 사람들의 도시


 이른 아침이었다.  

창밖에는 출근하는 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빌딩 사이로 떠오르는 햇살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나는 병원의 문턱을 넘었다. 자동문이 열리며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병원은 이미 아픈 사람들과 그 아픔을 맞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오는 사람들, 아픈 데가 더 심해져서 오는 사람들. 그들은 서둘러 번호표를 뽑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시계에 고정했다. 마치 자신의 아픔을 숫자로 측정하려는 듯이. 손에 꼭 쥔 번호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병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매번 새로운 듯하지만 언제나 같은 풍경이었다. 


나도 번호표를 뽑았다. 52번. 현재 45번이 호출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 달랐다. 고통을 참는 표정, 지친 눈빛,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어딘가 아파 보인다는 것. 병원에 오면 아프지 않아도 아파야 할 것 같았다. 공기마저 무거웠다. '드르륵... 쿵' 하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소리도 지친 듯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아파야 공평한 것 같았다.


"52번 환자분 들어오세요."

호출 소리에 일어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차트를 보며 말했다.

"많이 안 좋으세요."


익숙한 말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동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픈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한지는 모르겠다. 의사의 말은 언제나 과장되어 들렸다.

"최근에 특별한 증상은 없으셨나요?"


말하려던 순간, 머뭇거렸다. 사실은 있었다.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앞에서는 항상 말문이 막혔다. 대신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아, 네. 괜찮아요. 참을 수 있습니다."

의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약 잘 드시고, 다음 달에 다시 뵙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와 원무과로 갔다. 계산서에 적힌 금액을 보고 다시 한번 아파졌다. 지갑이 얇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약봉지를 받아 병원을 나섰다.


 한낮의 서울은 뜨거웠다. 

태양은 거리를 가득 채웠고, 아스팔트에서는 열기가 올라왔다. 서울 매미는 유난히 '빼-액' 대며 울어댔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두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만 웃을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려 보았다. 내천(川) 자로 구겨진 내 얼굴은 주변 사람들과 닮아갔다. 그렇게 걷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어딘가 아프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길을 걷다 보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주변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 신문을 읽는 노인,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청년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어딘가 지친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작은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장난을 걸었고, 노인은 신문의 유머 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청년은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울은 아픈 사람이 참 많은 도시다. 그래서일까? 언제 어디서나 서로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아픔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은 따뜻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저녁 먹을래?"

잠시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좋아. 어디서 볼까?"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 자체로도 위로가 되었다. 공원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매미 소리도 이제는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는 커플, 거리의 음악가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


 나는 생각했다. 

아픔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는다. 병원에서 느꼈던 무거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이 자리 잡았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며, 나는 문득 서울이 좋아졌다.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 미소가 지어졌다.

"서울, 참 이상한 도시야."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에 스스로 웃음이 났다. 아픔과 행복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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