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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Oct 27. 2024

오늘 같은 밤이면

그대를 품에 가득 안고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신라호텔이었다.

밝은 대낮인데도 그녀 혼자 빛나고 있었다. 작고 동그란 이마 뒤로 넘어가는 머리칼이며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잔머리 때문인지 한참 어리게 보였다. 나는 교생이라도 만난 것처럼 설레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사인부터 받아야 할지 아니면 손부터 덥석 잡고서는 인사할지 고민하면서도 눈은 그녀에게 빠지고 있었다. 밝게 퍼지는 얼굴에 색이 투명하게 빛나는 빨간 루주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젊은 엄마가 볼에 남겼던 것도, 도장의 첫 키스 상대 인주와 비슷한 거였다. 언젠가 연인의 입술에 민낯이 드러나도록 훔쳐먹던 루주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호텔 로비의 무대 조명과 걸음걸이 모든 게 아저씨인 나에게 이질적이었다. 그 장면을 여러 프레임을 나뉘어 각각 계절별로, 색깔별로, 장르별로, 선입선출로 남기고 싶었다.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여자와 하고 싶었다.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통영에서 보고 한 삼 년이 흘렀으니까. 사랑이 유행병처럼 지나기도 했었다. 무언가 확답하고서는 스스로 확인하는 일, 그러니까 술 먹고 전화하면 안 되는 소주 한잔 노래의 주인공. 그게 나였다는 거. 여보세요, 나야. 임창정이 부르는 거 보면서 찌질하구나. 난 그러지 말아야지. 친구가 그럴 때에도 난 그럴 리 없지 암 없어야지. 취중진담은 오래전 회차가 끝났으니 남은 것은 술 먹고 전화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오늘 같은 밤 사무치게 그리운 밤, 왜 그런 게 차오르는 밤 있지 않는가. 괜히 편의점에 어슬렁 거리며 네 개 만원 하는 캔맥주와 그것보다 비싼 안주를 사들고 앉아 그리움에 짠하고 부딪히는 그런 밤. 온갖 청승을 대동해 어딘가에 있을 외로움을 전달해서 누군가가 나의 부재를 알아차려주기를 바라는 그런 밤. 매번 훔쳐보는 그녀가 대뜸 보고 싶다고 전화해 대는 밤. 그 무언가 부족해도 그렇고 그런 낭만이 가득한 밤이고 싶었다. 싶어서 싶음을 만들어서라도 느끼고 싶은 밤이라는 얘기.



언젠가 승진은 술에 취해 내가 보고 싶다면 만나자는 일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술 마시고 있다 했다. 우리 그냥 만나면 안 돼요. 나 오늘 점장님 꼭 만나서 줄 게 있단 말이에요. 자취방에 앉아 별 생각을 다 했다. 두세 평 방을 서둘러 치우고 무언가 피워댔으니까. 승진 씨 많이 늦었어요. 빨리 들어가요. 나중에 만납시다. 언제요, 셰프님 이제 라멘 가게에 없잖아요. 나 셰프님 없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셰프님이 언제나 서 계시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 남자가 사라졌다고요. 내 낭만 돌려내요. 그리고 사과해요. 나한테 사과해요. 난 그쪽이 좋은데.. 그쪽이 일을 그만뒀으니까. 사과해요.



이런 날 승진을 만나면 뻔했다. 누구라도 만나면 안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강령을 정해둔다. 아니 성종이는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규칙은 깨는 맛이라면 이러한 기회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놈이었다. 이렇게 여자가 매달리면 둘 중 하나였다. 외롭고 힘들다는 거. 사람에게 감정은 교차하면서 일어난다. 아주 매콤하게 볶은 무교동 낙지를 먹고 난 후 부드럽게 입안에 퍼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것처럼. 외롭게 된 이유와 힘들다는 것은 문장을 쓸 때에도 종종 붙어 다니는 친어나 다름없었다. 또한 외로움은 눈물짓게 하고 밤을 힘들게 하고 깜빡거리는 커서는 공포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날이 뻔했으니까. 대조되는 무엇을 찾아야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비되는 무엇이 되고자 친어와 같은 나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나를 보자마자 그 큰 키로 와락 하고 안고서는 울어댔다. 백칠십이 넘었으니까 나와 차이는 거의 없었다. 내 어깨 바로 옆에서 울고 있었으니 눈물 범벅된 알코올향이 피어올랐다. 그 향기들 사이 익숙한 향수. 조말론 블랙베리의 향이었다. 달콤한 노트 뒤에는 시트러스 한 향긋함이 머리칼 뒤로 뻗어나가는 것을 붙잡아 들이마셔버렸다. 술에 취한 몸은 뜨겁게 온기를 전하고 유난히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도 그녀의 왼쪽 가슴 진동이 나의 간에 전달되어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가죽 재킷을 즐겨 입던 승진은 그날도 그랬다. 술집이었는데 그녀의 친구들은 떡이 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셋을 데리고 모텔에 하나둘 씩 옮겼다. 데리고 간 게 아니라 무거운 떡 상자 그러니까 한 가마니는 족히 넘는 여자 셋을 여러 번에 걸쳐 둘은 다른 방에 한 방은 나와 승진이 들어왔다.


침대 위에 누이고서는 바라보는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음껏. 무엇이든 괜찮다. 그 상상대로 흘러갔을 테니까. 현실, 이 말의 묘미는 언제나 극적이었다. 야,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되니까 현실인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잖아. 인간적으로 아니라는 거야. 성종이는 현실에서 해결이 안 되면 종족을 앞세워 논리의 감정을 설명하려고 했었다. 그 우리 종족 얘기, 인간적으로 여자 셋 침대에 누이고 신발 벗기고 옷 벗겨서 걸어두고 재우는 일을 상상해 보라. 다 큰 딸년들 돌보는 아빠 같았다. 내가 살던 동네 모텔은 대부분 깨끗했다. 대학생도 많았고 유학생도 많고 여러 민족을 대표하는 청년들이 넘쳐나고 있었던 곳이다. 여자 셋을 차례로 데려와 방으로 옮기는 나를 보는 아르바이트생이 무척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도와주겠다는 거 극구 사양했다.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건지 감지가 됐으니까. 자기가 필요하면 불러달라는 거였다. 아니다, 그럴 일이 없다. 물이 필요하니까. 미리 좀 가져다 달라. 그리고 304호에는 내 허락 없이 노크도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자기가 필요하면 꼭 불러달라 했다.



땀범벅이 된 그날 밤.

여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동굴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승진의 친구들에게 메모를 남기고 내 번호를 적었다. 술값이며 방값이며 삼십 대 아저씨가 다 계산했다. 자취생 셋방살이었지만 내 지위는 사장이었다. 오빠라는 역할로서 그럴 수 있다고 쿨하게 생각했다. 난 어른이었으니까. 불순한 자들은 고깃값 아니냐고 한다. 그거 떡값 아니냐고. 내 이름은 변강쇠가 아니었다. 직업 난봉꾼도 아니었다. 요리를 잘하는 남자 셰프였다. 그날 밤 내 무드는 은하를 그리워하려던 참이었다. 술을 진탕 먹고 전화할 요량이었다. 그 모든 계획이 무너진 방에서 덜컥 여자 셋을 감당하라니. 나도 모르게 쳇, 하고 웃어댔다. 소설에서 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열망과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런데 현실이라는 낱말이 주는 묘미란 역시나 극적이었다는 거.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재빨리 씻고 나오고 싶었다. 승진은 검은 재킷과 검정 가죽 치마, 검은 스타킹이 다리 곡선에 따라 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 길이가 꽤 길다고 생각했다. 아득하게 이어진 길 따라 허벅지 위에 다다르자 허벅지 둔덕에는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성종이는 패티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침을 얼마나 꼴깍였을까. 그녀의 속사정을 알고 싶었다. 시선은 언제나 본능을 자극해 대니까.


우리 할머니가 나를 홀딱 벗기고서는 소유하셨던 내 고추를 아는 것처럼. 음냐음냐대는 승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상상이든 해보라.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 인간적으로 감상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됐으니까. 그러나 일전에도 잡아본 적 있는 썩다만 동아줄을 붙잡았다. 끊어지길 간절히 바랐지만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불쌍한 호랑이를 생각하던 중 승진은 벌떡 일어났다. 머리 말리고 있는 내게 말했다. 벌써 끝난 거예요. 나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언제 한 거예요. 왜 옷은 이렇게 입고 있는 거예요. 다시 울먹이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온 지 두 시간 됐어요. 그러니까 그 두 시간 동안 잠만 잤냐고요. 네. 잠만 잤어요. 셰프님은 왜 안 잤어요. 제가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는데 왜 안 잤어요. 왜 자요. 아직 잘 시간이 아닌 걸요. 성실하게 응답했다.


"저 승진이에요!"


알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언제고 좋아했었다고 고백했었다. 그녀는 마치 남자들이 꿈꾸는 모든 것을 조합해 세상에 내려온 사람 같았다. 완벽하게 잘 맞아떨어진 모습은 어디 하나 허술함이 없었고, 그 당당한 아름다움에 ‘이기적이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길고 고운 다리가 만들어내는 선은 조각품처럼 정교했다. 치마 자락 위로 이어진 허벅지와 엉덩이의 곡선은 시선이 닿을수록 매혹적인 굴곡을 드러내며 그 매무새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듯 완벽했다. 청바지와 흰 티가 경계를 이루는 허리선 아래, 살짝 들어간 허리가 곡선을 따라 유려하게 드러났다. 마치 모든 라인이 자연스레 몸에 딱 맞추어진 듯, 허리와 골반 사이의 섬세한 조화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흰 티셔츠 위로 적당히 솟은 가슴이 흐트러짐 없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큰 키와 작은 허리를 배경으로, 그 티셔츠 속 자그마한 기백의 봉우리들은 알맞은 위치에서 시선을 붙잡았다. 마치 하얀 봉우리가 언덕 위에 자리한 듯, 그녀의 곡선 하나하나가 섬세하면서도 이지러짐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학의 퀸카인 것을 잊으면 안 됐다. 훗날 연예 기획사에 들어갔다는 말과 유명 피팅 모델이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사이 어떤 아저씨와 잤다는 소문을 나면 안 될 일이었다. 승진은, 내가 어른이라서 자연스럽게 자기와 잘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난 승진 얘기 들으려고 왔는데. 피-그런 게 어딨어요. 남녀가 이렇게 방에 왔으면 서로의 속사정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고개를 돌려 승진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까인 적 없는데 내가 깐 모양이었다. 가만히 안아주었다. 승진 씨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데 외롭거나 힘들면 와 함께 마시고 이렇게 다시 오자. 다시, 이 단어 가진 가능성은 언제나 인간을 속여왔었다. 그렇게 운기칠삼, 사람 일 모르니까. 로또 일등은 팔십일만사천오백육십 분의 일이었다. 운 백이었고 기량은 택도 없었다. 그래,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난 아저씨니까. 지안에게 물어야 했으니까. 평안에 이르렀냐고.


"일단 방으로 가실까요."


만나자마자 방으로 가자니, 무슨 속셈인가. 여러 번 경우의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내 속은 무난한지, 복근은 무사한지 몸과 마음은 준비가 됐는지 온갖 김칫국을 종류 별로 너무 마셔서 방귀 뀔 때마다 잘 익어 숙성된 묵은지 향기가 진동했다. 보는 사람이 많아서요, 방으로 가요. 여기는 우리 최실장. 안녕하세요. 두 분 커플이 아니셨군요. 맞아요. 최실장은 나를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경우의 수에 없던 최실장은 무난하고 무사한 속사정보다 내 안전이 먼저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박현주 이사는 생각보다 더 어리고 젊었다. 고작 네 살 차이가 났으니까. 그리 멀지 않은 그러니까 같은 어른의 범주에서 동등하게 서로의 안위 속 대화할 수 있었다. 짧은 목례 마치고 최실장이 나갔다. 스위트 룸 중문을 닫았다. 곧 그녀가 자리를 바꿔 가까이 앉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주 느린 속도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내 시선을 지나 귀에 아주 고요하게 퍼지는 향기 불어대기 시작했다. 아득한 꿈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가는 향이 블라우스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내내 그 취해있었으니까. 똑똑, 노크 소리 이후 최실장이 다시 들어왔다. 다시, 낱말 속 일말 가능성은 또 그렇게 무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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