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은 불혹부터.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자기계발서가 주로 근면과 도덕, 자조(自助)의 정신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새뮤얼 스마일스가 있다. 그는 『자조론(Self-Help)』(1859)을 통해 개인의 노력과 독립적인 삶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기 신뢰(Self-Reliance)』(1841)에서 인간의 내면적 힘과 독립성을 강조하며 초월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자기 계발서를 남겼다. 또한, 제임스 앨런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As a Man Thinketh)』(1903)를 통해 긍정적인 사고가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사상을 제시하며 현대적 자기계발서의 기초를 놓았다.
20세기 초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자기 계발의 개념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오리슨 스웨트 마든은 『Pushing to the Front』(1894)와 『An Iron Will』(1901)에서 긍정적 사고와 근면이 성공을 이끈다고 강조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나폴레온 힐은 『Think and Grow Rich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1937)를 통해 목표 설정과 믿음이 부를 가져온다는 법칙을 설파했다. 한편, 데일 카네기는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 (인간관계론)』(1936)을 출간하여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1950년대 이후, 자기 계발은 단순한 개인 성공론을 넘어 심리학과 신념의 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노먼 빈센트 필은 『적극적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1952)에서 긍정적 사고와 신념이 삶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했고, 얼 나이팅게일은 『The Strangest Secret (가장 이상한 비밀)』(1956)을 통해 성공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했다. 1980년대에는 스티븐 코비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1989)을 통해 자기 계발을 체계화하고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대적 자기 계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자기 계발은 더욱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변했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Rich Dad Poor Dad)』(1997)를 통해 금융 교육과 자산 관리의 개념을 대중화시켰다. 이후 찰스 두히그는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2012)에서 인간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며, 습관 형성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다. 이어 제임스 클리어는 『아토믹 해빗(Atomic Habits)』(2018)을 통해 작은 습관의 변화가 어떻게 인생을 바꿀 수 있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최근에는 마크 맨슨이 『신경 끄기의 기술(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uck)』(2016)을 통해 기존 자기 계발서의 이상주의적 접근을 비판하며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자기 계발서의 흐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전해 왔으며, 초기에는 도덕성과 근면을 강조하다가 점차 인간 심리와 행동 패턴, 성공 전략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조론』, 『자기 신뢰』,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 『인간관계론』, 『적극적 사고방식』, 『습관의 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아토믹 해빗』 등의 책을 읽어왔다.
여기에서 나는 국내에 나온 아류작들까지 읽었다. 자기계발의 화신일 정도로 보았다. 1년 동안 300권을 보기도 했다. 하루에 한 권을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계발류의 책이라 가능했다. 그 이후 자기계발 서적의 '흑'에 해당되는 책들을 보았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그 기능과 역할, 부작용에 대해 탐구하게 됐다. 그러니까 헤겔의 정반합에 따라 흑백 영역을 전부 읽고 대조하였다. 그 시간이 마흔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하나는 무의식의 영역이었고 또 하나는 유물론이었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싸움이랄까. 독서량이 어마무시하게 늘어나는 어느 시점에 자기계발 서적은 아예 보지도 않게 되었다. 주로 철학 일차 자료들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게 되었다. 고전 중심 특히 철학 고전을 플라톤에서 고대 기독교, 중세 기독교, 임마누엘 칸트를 지나 들뢰즈에서 지젝까지 달려왔다. 더불어 라캉이나 데리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까지 탐구해 온 것이다.
주체와 객체, 인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사유하게 되었다. 종점에서는 전부 인식 주체인 나에 대해서. 실존에 대해서. 구조주의 안에서 실존이 아닌 객체에 대해서. 모두가 같은 주제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만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담론이 달랐을 뿐. 칸드에 말대로 나는 인식 주체이기도 하면서, 대상이기도 하면 객체인 것이 ‘나’라는 것이 옳았다. 이는 불교의 유식학파와 알맞게 떨어진다. 누구나 들어본 ‘일체유심조’를 칸트는 순수이성의 비판 시리즈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참 서럽기도 하다.
바늘구멍에 실 하나 끼우는 데에도 거리 조절을 해야 하고 술 몇 잔 더 마시면 일주일을 고생하게 된다. 체력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것, 살은 왜 그리도 안 빠지고 배기는지. 이제는 함께 가야 하는 친구인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이해의 영역은 어마무시하게 넓어졌다. 통찰이 늘었고 해석의 다양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주름은 늘고 얼굴에는 흑자가 생기고 기미가 무성한 만큼 나의 사유의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지고 성숙해져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는 무시무시한 체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러한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지탄받기 딱 좋았다. 흔히들 그런다.
야, 그런다고 돈이 되냐?
돈이 되니까 사유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없어 함구하며 살았다. 덕분에 내가 제일 잘 나간다.
소설 작업을 위해 정력적으로 두 달간 30여 권의 책을 읽어댔다. 철학 책에서 벗어나 읽는 이야기는 단물 그 자체였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현실은 이미지, 의 글도 그런 영향이라 말할 수 있겠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너무 소비한 탓에 이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잘 없다. 혹자는 이를 불교 용어가 아니냐고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본래 힌두교에서 왔다. 다만 불교의 재창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도에서 힌두교는 우리네 유교전통과 같다고 보면 된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예배를 드린다고 그들이 거룩한 기독교 국가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생활양식, 그들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문화적 특색이라고 보면 된다. 영국 국교회의 핍박을 피해 넘어온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 그런 것이다. 싯다르타 역시 시대의 산물로서 힌두 전통이 사유에서 묻어나는 데, 고대 인도 갠지스 강에는 시체가 마를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가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무더운 날씨에 위생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건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인도에서 자기(self)계발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니 우리가 사용하는 자기계발의 뜻이 인도 태생이라고 해야 하겠다. 자기, 자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게 분석심리의 칼 융 때부터다. 그리고 계발이라는 말이 가진 뜻은 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몽의 의미가 깨우치다는 것처럼, 자기를 열다, 깨우치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열고 깨우칠 대상이 자기 자신(self)인데 이는 육체가 될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를 신일합일이라 가르친다. 자아,라고 부르는 그 말이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자아. 참나라고 부르는 그 존재에게 들어가고자 문을 여는 행위가 자기 계발이라는 뜻이다.
그럼 왜 나와 하나 되는 것을 신일합일이라 불렀을까. 신일합일을 이루면 어떻게 되길래.
힌두 분파인 자이나교에서는 이를 요가 수행을 통해서 획득하려고 했다. 요가 자세를 내가 응시함에서 수행이 되는데, 그 응시하는 존재가 내 안에 있는 참나인 것이다.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쓴 책이다. 흔히 NLP(신경언어프로그램)이 자기 계발에서 사용하는 긍정의 확신이나 용어들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요가 수행자들의 인삿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나마스떼"
이 말은 본래 상대방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참나, 즉 신(self)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참나는 신이다. 그 신에게 인사하는 것이다. 그와 합일을 이루면 육체를 입은 나는 신이 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앤서니 라빈스의 책 [무한능력]은 그렇게 탄생한다. 인도는 아트만, 초기불교는 아라한이라 말하고 미국에서는 거인 또는 슈퍼맨으로 해석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초인(위버멘쉬), 아랍에서는 램프의 지니로 본 것이다. 유교는 군자(성인), 도교는 신선, 불교는 주인공, 우리나라는 홍익인간이라 말하고 있다.
다음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