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Oct 08. 2024

My Cinema Aphorism_24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4

CA116. 정지우, 〈침묵〉(2017)

   사랑에서 경중(輕重)을 따질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실은 아주 엄정한 경중의 차이가 있다는 걸, 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솔직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둘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 다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택이 아니다. 선택의 본질은 나머지 하나를 버리는 데 있다. 선택을 강요받은 쪽은 강요받은 대로 하나만을 선택하거나, 둘 다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선택 자체를 포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일종의 기권이다. 그는 딸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애인, 남편 이전에 먼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스탠스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선택 앞에서 진실 따위는, 또는 진실의 규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또는 안중에도 없다. 세상은 그를 욕하지 못한다. 이걸 알기 때문에 그는 굳세게 침묵한 것이다.


CA117.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타인의 삶〉(2006)

   나는 〈타인의 삶〉을 예술가가 어떤 상황에서 비로소 창작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영화로 읽고 싶다. 창작할 수 없을 때 예술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인간 이하다.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닐 때 인간 이하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창작해야 한다. 또 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이상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 이하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 이상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라면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창작을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하기에 그들의 예술이, 또는 예술을 하는 그들의 행위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도 따라서 바뀐다. 그 바뀌는 과정에서 예술은, 그리고 예술가는 위대해진다. 그 독신의 비밀경찰이 위대한 것은 반체제 작가에 대한 인정이나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배우에 대한 순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술가에게 예술을,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작가가 마지막 순간 그 몰락한 비밀경찰을 만나지 않고 그냥 지나쳐간 것은 바로 그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로 보답해야 그의 위대함이 진짜 위대함이 된다는 것을 작가는 그 순간 깨달은 것이다.


CA118. 조지 하이켄루퍼, 〈팩토리 걸〉(2006)

   그녀의 파멸을 왜 아무도 막지 못한 것일까. 예술도 사랑도 그녀의 파멸을, 또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이런 인생이 있다. 막을 수도 없고, 막아지지도 않고, 막을 방법도 없고, 막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앤디 워홀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온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가이 피어스는 마치 〈도어스〉(1991, 올리버 스톤)의 카일 맥라클란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인상적인 연기가 앤디 워홀을 위한 것인지, ‘팩토리 걸’을 위한 것인지는 조금 헷갈린다. 이 영화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그녀, 팩토리 걸, 에디 세즈윅이 압도적이다. 그녀가 이 영화 속에서 압도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강점이라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CA119. 크리스 크라우스, 〈포 미니츠〉(2006)

   그녀는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의 제자다. 그녀는 푸르트벵글러의 사진을 자기 집 거실 벽에 걸어놓고 있다. 기리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예술관은 한순간에 파악된다. 그런 순정함이 반항으로 똘똘 뭉친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망나니 천재 소녀와 맞닥뜨린다. 이 충돌이 빚어내는 불협화음 자체가 이미 심포니다. 뒷짐 진 두 손에 수갑 차고 돌아선 채로 소녀가 감행하는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와 마지막 순간 무대 위에서 백남준을 무색하게 하는 다이내믹한 그녀의 또 한 번의 피아노 퍼포먼스는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백미다.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의 주걸륜(저우제룬)이 울고 갈 명연주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걸 놓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피아노 혐오증에 걸린 사람이겠지.

 

CA120. 이상일, 〈훌라 걸스〉(2006)

   일용할 양식에 얽힌 서민들의 애환은 얼마나 애달픈가. 그들이 무언가를 하지 않고 모두 자폭하기로 결심한다면, 그래서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그들의(또는 우리의) 발버둥에 우리는(또는 당신들은) 모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발버둥은 우리의 발버둥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처럼 발버둥 칠 때 아무도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아, 끔찍하다. 마지막 순간 무대 위에 선 아오이 유우의 함박웃음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감동인 까닭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라는 문제와 철저하게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각이 중요하다.  *

매거진의 이전글 My Cinema Aphorism_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