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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Oct 11. 2024

My Cinema Aphorism_25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5

CA121. 토드 필립스, 〈조커 : 폴리 아 되〉(2024)

   사람들은 조커를 원할까, 아서 플렉을 원할까. 또는 아서 플렉이 아서 플렉으로 남아 있기를 원할까, 조커로서 어떤 활약을 하기를 원할까. 아니, 이런 질문 또는 의문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쨌거나 조커를 원하는 쪽과 아서 플렉을 원하는 쪽, 곧 조커를 원하지 않는 쪽으로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들은 이미 갈려 있다. 그래서 각기 자신이 원하는 쪽에 스스로의 욕망을 투사할 것이다. 이는 배트맨을 원할까, 브루스 웨인을 원할까, 또는 브루스 웨인이 브루스 웨인으로 남아 있기를 원할까, 배트맨으로 어떤 활약을 하기를 원할까, 하는 질문 또는 의문과 정확히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사태다. 조커를 원하는 쪽에서는 동시에 배트맨도 원할 것이다. 사실 조커의 짝은 아서 플렉이 아니라 배트맨이며, 동시에 배트맨의 짝도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이다. 짝이 아니기 때문에 조커와 아서 플렉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아서 플렉이 칼을 맞은 것은 조커를 원하는 쪽의 간절함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더 간절한 쪽의 바람대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영화의 다음 편이 나온다면, 비로소 진짜 조커의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CA122. 김덕철, 〈강을 건너는 사람들〉(2006)

   강을 언급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놓기 때문이다. 강은 매립하지 않는 한 건너야 한다. 강은 바로 이 ‘건넘’이라는 행위를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강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어느 한쪽에서는 그것을 건너야 한다. 그래야 이쪽과 저쪽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인내가 필요하다. 이해가 필요하다. 아량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건너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응원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이쪽의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또는 그들 덕분에 저쪽의 또 다른 우리와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만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


CA123. 정범식 & 정식, 〈기담〉(2007)

   한 감독이 만드는 옴니버스의 성패는 에너지의 적절한 분배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에너지를 적절하게 분배한 사례를 나는 별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왜 이 프로젝트를 여러 감독이 나누어 맡지 않았을까. 아니면, 차라리 세 편의 단편영화로 각기 독립시켜 만든 다음 하나로 묶는 과정을 거쳤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 영화의 세 에피소드는 다행스럽게도 정말 ‘기담’ 같다. 아무렴, 그러면 된 것이다.


CA124. 이창동, 〈밀양〉(2007)

   포스터의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카피를 보면 또 다른 〈밀양〉이 있는 것만 같다. 하긴 이 ‘또 다른 밀양’도 분명히 〈밀양〉의 일부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쩐지 〈밀양〉 본연의 그 강렬한 끈적거림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이청준 선생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의 주제가 얼마나 생생히 현재진행형의 것인가를 이 영화는 웅변으로 증명한다. 한데, 왜 대구나 부산이 아니라 하필 밀양이어야 했을까? 이 치 떨리는 발음의 끈적거림! 밀! 양!


CA125. 김태식,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2006)

   그는 아내의 애인을 만나러 가지만,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아내의 애인이 아니라, 아내의 애인의 아내다. 요컨대 그는 아내의 애인과 아내의 애인의 아내를 다 만나지만, 아내는 끝내 만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점이다. 왜 그는 자기 아내는 만나지 못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왜 만나지 않은 것이냐고 물어야 할까? 이 영화에서는, 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박광정에게서는 어쩐지 핵심에 가 닿기를 거부하는 어떤 본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는 아내의 애인, 또는 아내의 애인의 아내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아내 그 자체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끝내 자기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만다. 여기에는 기이한 엇갈림이나 회피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에 이 영화의 감추어진 진정한 주제가 걸려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홍상수식의 멜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지니고 있는 가장 놀라운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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