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6
CA126. 윤성호, 〈은하해방전선〉(2007)
유쾌한 데뷔작. 하지만 함정이 있다. 데뷔작일 때, 또는 데뷔작이기 때문에 유쾌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이걸 뛰어넘어야 하지 않을까. 유쾌하다는 것이 더는 장점일 수 없는 시점이 생각보다 금세 다가온다는 것. 〈말라노체〉(1985, 구스 반 산트)나 〈캐쉬백〉(2007, 숀 엘리스)의 집중력이 보완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아니면, 이 영화는 그런 집중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지도. 산만한데, 유쾌하다는 것, 또는 산만하기 때문에 유쾌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강점. 이런 유쾌함의 나이브한 반복만 피한다면. 이 점에서 우디 앨런은 이 반복의 위험을 어떻게 피해 갔을까? 또는 극복했을까? 아마도 이 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의 여부가 이 데뷔작 이후를 규정하지 않을까.
CA127. 양해훈,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2007)
치타를 저수지에서 건진 것이 누구인지를 이 영화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요컨대 치타는 저수지에서 ‘건져진’ 것이다. 저수지를 ‘탈출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그를 저수지에서 건져주었다. 이것이 성장이라는 테마로 이 영화를 읽을 때 이 영화가 속절없이 드러내는 한계가 아닌지. 이런 식의 수동적인 건져짐은 뒷날 반드시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있지 않을까. 그 문제에 대한 우려가 이 영화의 밑바닥에서는 보이지 않게 흐르는 느낌. 또, 이 영화에는 〈은하해방전선〉과는 다른 의미의 산만함이 있다. 욕망의 산만함이라고 하면 될까? 또, 이 영화에는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이나 〈생활의 발견〉(2002, 홍상수)을 떠오르게 하는 어떤 욕망의 모호함이 있다. 이 모호함이 치타가 아직은 조금 더 가야 하리라는 느낌을 유발한다.
CA128. 폴 그린그래스, 〈플라이트 93〉(2006)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알려진 것은 그 결과일 뿐. 추락이되 목표를 상실한 추락이라는 결과. 그리고 절멸. 세상에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알 법한 일들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리얼리티에 반대하지 못한다. 남아 있는 것은 추락과 죽음뿐이건만, 우리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 영화의 묘사에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못한다. 어쩐지 그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것도 속절없는 노릇이다.
CA129. 기에르모 델 토로, 〈판의 미로〉(2006)
자기희생이 구원의 보증수표라는 주제의 익숙함. 제2차 세계대전의 강박. 판타지로 전쟁의 참혹함을 이겨내려는 시도.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어린아이에게는 판타지가 필요하다는 엄중한 사실. 판타지는 어쩌면 어린아이의 숨구멍이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 이은 또 하나의 전쟁 판타지. 따지고 보면, 《안네의 일기》도 결국은 판타지라는 숨구멍이었다는 것. 〈인생은 아름다워〉(1997,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빠는 바로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판타지를 안겨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모름지기 어른은 아이에게, 아이를 위해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으로서 아이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사과요 속죄요 빚 갚기라는 것.
CA130. 구로사와 기요시, 〈절규〉(2006)
일본 사회에 잠재하는, 또는 일본인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불안을 상징하는 지진과 귀신의 상관관계, 또는 지진과 귀신이라는 존재의 상관관계, 또는 지진과 귀신이 상징하는 것과의 상관관계. 그렇다면 귀신은 지진과 같은 존재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보아야 할까. 형체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며, 나타날 때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도 사라지면 다시 평온이 회복된다는 것. 하지만 사라지면 믿기 힘들어진다는 것, 나타날 때만 믿을 수 있다는 것, 지진도 귀신도 늘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 그래서 지진도 귀신도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두 개의 잠재된 두려움의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일본인들이라는 가차 없는 실존적인 지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