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8
CA136. 허우 샤오시엔, 〈희몽인생(戲夢人生)〉(1993)
한갓 꿈같은 인생. 파란만장했지만, 또, 대만 현대사의 온갖 굴곡이 그 삶에 겹쳐 있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면 그 길고도 험난했던 인생조차 한갓 꿈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되는 기이한 현상. 거의 전체가 플래시백인 매우 드문 영화.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플래시백은 역사에 대한 반추와 성찰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의 재확인.
CA137. 김용화, 〈미녀는 괴로워〉(2006)
추녀의 괴로움과 미녀의 괴로움,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추녀는 왜 괴롭고, 미녀는 또 왜 괴로운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추녀는 어떻게 해야 하고, 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고민이 한갓 추녀나 미녀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공통의 번민 거리라는 인식이 없는 한 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아마도, 필경은 무의미할 것이다.
CA138. 시노하라 테츠오, 〈사자의 학원제〉(2000)
드뷔시의 ‘달빛’과 연극, 그리고 그림. 또, 슬픈 사랑 이야기. 거기에 전설 또는 학교 괴담, 그리고 투신자살의 서사. 예배와 찬송가. USB가 아닌 플로피 디스켓의 시대가 빚어내는 아날로그의 냄새. 무엇보다도, 아니, 또다시 나쓰메 소세키. 코코로(こころ), 마음(心). 스승과 제자, 또는 선생(교사)과 학생. 감정이 엇갈리는 양상. 금기와 억제의 이데올로기. 자살과 타살의 테마. 이때 어째서 늘 타살은 자살로 위장되는 것일까. 난데없는 독일인 미술 교사. 민수기 29장 1절. ‘칠 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 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예언, 또는 암시, 또는 맥거핀. 쇼팽과 드뷔시. 기분 나쁜 선율. 이 경우는 쇼팽 쪽이 문제가 된다. 연쇄살인. 푸른 눈동자의 천사. 죽은 이들의 학교 축제. 공연. ‘배움’터인 학교에서 축제와 같은 행사는 왜 하는 것일까. 위작. 모사. 위조. 그리고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돈 문제. 조금 느리거나 어설픈 액션. 위작과 진품 사이에서 진품을 지키는 방법. 아버지에 대한 신뢰. 영혼을 구하는 진실의 힘. 사제간의 신사적인 이별의 서사.
CA139. 마이클 파웰, 〈흑수선(黑水仙)〉(1947)
오지에 파견된 수녀들은 끊임없이 속세의 기억에 시달린다. 그들은 아직 젊기 때문이다. 신께 온전히 자기 존재 전체를 바치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아직은 그들의 몸속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지 못한 탓이다. 그들이 그 때문에 괴로운 것은 당연하다. 사실은 그 과정 자체가 종교적 훈련에 해당한다. 히말라야는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다. 이 영화가 기이한 것은 수녀들이 중심에 놓여 있는데도 종교적인 거룩함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수녀들을 파견하는 과정에도, 파견된 수녀들이 오지에서 수도원을 꾸려나가는 과정에도, 심지어는 예배의 과정 자체에서마저도 거룩한 정서는 찾기 힘들다는 이 모순 아닌 모순의 느낌. 이것이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이 아닌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외면 없고, 가차 없는 응시와 통찰의 서사―.
CA140. 나루세 미키오, 〈흐르다〉(1956)
끝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착하고 공손한 심성의 여인에 대한 감독의 집착, 또는 편애. 한데, 그녀한테서는 왜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이나 비운의 정서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이른바 ‘전쟁미망인’이며, 가족을 몽땅 잃고 고향을 떠난 인물인데도. 그런 그녀가 게이샤들의 집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는 설정의 의미심장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