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0
CA146. 김정권, 〈화성으로 간 사나이〉(2003)
문제는 그들이 너무도 착하고 예쁘고 순박하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것을 흔히 ‘위선(僞善)’이라 일컫는다. 이 영화의 드라마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 탓이 아닐까. 이 영화가 수몰지구 주민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는지, 아니면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지가 때로 모호해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그들은 착하게 보이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다. 세상에 악한 사람만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듯, 세상에 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진리가 아니다. 한 인간의 경우로 축소시켜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무시한 전제 위에서 시작한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알퐁스 도데의 〈별〉에 대한 유구한 강박관념은 이제 다소 식상한 느낌이 있다.
CA147. 존 카펜터, 〈화성의 유령들〉(2001)
끊임없는 플래시의 향연. 난항에 빠진 경찰과 무도하고 무지한 광산 노동자들, 그리고 화성. 거기에서 그들이 직면한 유령. 그 실체 아닌 실체가 바로 끝없는 괴로움의 원천이다. 마약과 환각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아이러니. 영육 이원론의 맹점은 육체를 아무리 파괴해도 영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 유령은 육체가 아니다. 따라서 육체를 아무리 죽여도 유령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런 유령들이 화성에조차(!) 득시글거린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CA148. 신경균, 〈화심〉(1958)
기생인 그녀 화심의 임종 자리에 모인 두 여인과 두 남자는 마침내 일대 개심을 하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모든 갈등이 봉합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영화의, 또는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어찌 되었든 모든 갈등을 봉합해야만 한다는 이 이상한 강박관념.
CA149. 프루트 챈, 〈화장실 어디에요?〉(2002)
인도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개념은 뚜렷하다. 영화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보는 것. 따라서 인도 영화에 뮤지컬 장르가 많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들은 영화관 속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행복해지려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중국 사람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답한다. 영화가 없다면 인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어쩌면 그들은 이제 혁명보다도 영화를 더 원하고 있는 것일까.
CA150. 이무영, 〈휴머니스트〉(2002)
마지막 순간 살아남는, 곧 단죄받지 않는 사람은 군인 출신의 아버지와 퇴역 경찰, 그리고 수녀다. 하지만 앞의 둘은 분명히 부도덕한 인물들이다. 감독은 왜 그들의 손까지 들어준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