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베이, 〈아일랜드〉
C45. 인간의 소망과 제품의 소망 - 마이클 베이, 〈아일랜드〉(2005)
인간이냐, 제품이냐
‘아일랜드’는 ‘섬’입니다. 그리고 파라다이스지요.
사람들은 그 파라다이스, 낙원(樂園)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누군들 낙원을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는 바로 그 섬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품’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 섬을 소망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제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섬에 가고 싶은 소망은 사람이 아니라, 제품의 것입니다.
제품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품이란 사람이 어떤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들어낸 물건 일반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곧,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낙원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건이 사람과 동격인 형국이지요. 어불성설입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처음부터 모순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복제’인간, 복제‘인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그 사람들, 아니, 그 제품들을 가리켜 ‘복제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복제인간 이야기인데도 복제인간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제품’이라고만 호명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제품은 인간이 아니지만, 복제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복제인간이 인간인 것은 시험관 아기가 제품이 아니라 아기인 것과 같은 논리에서입니다.
복제인간이 논란거리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탕에 이 전제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복제양도 양이고, 복제소도 소고, 복제돼지도 돼지인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태어났는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 아닙니까.
무병장수의 신세계
영화는 올더스 헉슬리의 저 고전적인 ‘멋진 신세계’처럼 시작합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철저히 관리되는 완벽한 세상인 듯 보입니다.
특히나 인간의 건강과 관련하여 그곳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훌륭하게 작동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방의학의 차원에서 그것은 너무나 매력적이고도 효과적인 시스템입니다.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병에 걸리고 싶어도 걸릴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몸에 이상이 생겨도, 아니, 이상이 생길 징후만 감지되어도 당장 관리 시스템이 신속하게 움직여 끝내주게(!) 건강을 챙겨 주니까요. 무서울 정도로 빈틈이 없습니다.
그들은 시스템이 충고하는 대로 다소곳이 따라 주기만 하면 만수무강을 누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과연 멋진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인간은 모두가 건강하게 장수하고자 하는 염원을 성취한 듯 보입니다.
불완전한 인위
문제는 그 굉장한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것이 인간의 건강이 아니라, ‘제품의’ 건강이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관리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제품입니다.
하지만 관객으로서는 그들을 자꾸만 인간으로 보게 되는 것도 부정할 길 없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관리라는 업무는 제품이 아니라, 인간의 몫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인위(人爲)는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완전에 완전을 기하려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으로 노력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위 자체의 기본 조건입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고 완전해도 그것이 인위인 한 어디엔가는 틈이 있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그 틈과 실수가 드라마를 만듭니다.
제품의 의혹과 반란
영화는 제품의 의혹과 반란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극의 핵심입니다.
그 의혹과 반란이야말로 인위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틈이자 실수의 숙명입니다.
동시에 제품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조건에 의혹을 품고 자신의 의지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가 제품이 제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제품이 그 완전하고 멋진 신세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주제가 걸려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복제와 장기 이식
영화는 저간의 사정을 오래 숨겨두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의 놀라운 반전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
실인즉, 그 멋진 세계란 복제인간을 생산하고 관리하여 판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공장이지요.
게다가 영화 속에서 거론되는 수치대로라면 그 복제인간 제품의 소유권을 갖는 데는 무려 5백만 달러라는 거액이 듭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계급 차별은 이 신세계에서도 여전히 관철되는 원리입니다.
그 소유권자들은 5백만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복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 복제품의 관리를 예의 공장에 위탁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만일의 사태란 주로 장기 이식을 받아야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장수의 소망과 인간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위급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장기란 자연 상태에서도 상하고, 또 그 각각이 상하는 속도도 서로 다릅니다. 노화로 말미암은 장기의 자연 손상도 이 상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제인간 제품을 소유하는 궁극적인 목적, 또는 소망은 ‘장수(長壽)’에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자들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살기 위해 거액을 지불하고 자신을 복제한 제품을 소유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소유한 복제인간은 제품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영화가 마지막 순간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생뚱맞게도 감옥 탈출, 혹은 인간 해방의 스펙터클을 펼쳐 보이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제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결국 요약하면, 이 영화는 복제인간을 제품으로 규정하려는 기도의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복제인간, 또는 인간 복제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는 주장은 오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배아 줄기세포 복제 문제와는 더더욱 무관합니다.
그러니 복제와 관련한 생명윤리 논의와 이 영화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순된 전제에서 출발했으니, 실패담으로 끝날 수밖에 없지요.
이 점에서만큼은 이 영화의 결말은 옳습니다.
아니, 옳다기보다는 그럼으로써 최소한의 윤리 도덕적 존립 근거를 지킨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