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프리어즈, 〈더 퀸〉
C61. 왕관을 쓴 자와 쓰지 않은 자, 그 균형의 세 기둥 – 스티븐 프리어즈, 〈더 퀸〉(2006)
왕관을 쓴 자의 마음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왕관을 쓴 자 누구도 편히 쉴 날 없으니…….’
영화의 마음이 ‘왕관을 쓴 자’의 ‘편히 쉴 날 없’음을 헤아리려는 데 놓여 있음을 대놓고 암시하는 이 말이 바로 이 영화의 열쇠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시종일관 이 ‘왕관을 쓴 자’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주력합니다.
심지어 두 주인공의 한쪽인 토니 블레어 총리조차도 이 여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필요한 도구 또는 필터 노릇을 하니까요.
따라서 관객은 이 도구 또는 필터를 통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노력을 속절없이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서사입니다.
균형 확보하기
다이애너 왕세자 비, 또는 전 왕세자 비, 또는 민중의 왕비, 또는 백성의 공주의 선정적인, 일정 부분 매스컴이 조장한 그 화려한 빛에 가려져 어쩌면 숱한 오해의 시각에 시달렸음 직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카메라―.
그 카메라가 보여주는 여왕의 언행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시나브로 여왕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또는 여왕의 지위 뒷면에 숨어 있던 속마음을 눈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본 것만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힘, 또는 권세가 아닐까요.
여기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유리한 위치에 있음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다이애너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 일방적인 유리함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영화는 다이애너 생전의 실제 자료 화면을 다양하게 인용합니다. 이를 통하여 사고의 균형이 어느 정도는 확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충분하지는 않지요. 산 사람은 산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 둘 사이의 다름은 엄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영화의 목표가 이 균형의 확보에 놓여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균형이라면 다이애너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블레어 총리와 엘리자베스 여왕 사이의 균형이 목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덕분에 영화는, 어쩌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영화의 중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저 다이애너의 현실적인 부재로 말미암아 뜻하지 않은 자유로움을 얻은 셈입니다.
이 자유로움을 영화는 만끽합니다. 아니, 만끽의 주체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입니다. 관객은 마음이 편합니다.
다이애너 캐릭터가 스크린을 누비기 시작하면 ‘균형’은, 그것이 어떤 균형이든, 확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세 가지 기둥
결국 영화는 영국이라는 한 나라가 어떤 체제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내는가, 또는 피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왕실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왕가 사람들의 근심, 왕실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는 영국 정부의 근심, 그리고 그 어느 쪽에 대해서든 지극히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영국 국민들의 마음 또는 태도―.
결국은 바로 이 삼각관계가 영화 내내 유지되고 있는 긴장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왕으로서 엘리자베스의 자존심과 왕실의 품위와 국민에 대한 애정―. 이 세 가지가 예의 삼각관계를 균형 있게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기둥인 셈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진행형인 국가지도자들의 행태를 우스꽝스러운 변형이나 트릭 없이 영화로 옮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