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4
CA166. 라울 월시, 〈포효하는 20년대〉(1939)
주연인 제임스 캐그니의 아우라가 전체를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탓에 조연으로 나온 험프리 보가트조차도 얼마간 어설퍼 보이는 이 신기함.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돕고자 상대 범죄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나오다 총격을 받고 눈 덮인 계단에 쓰러져 맞이하는 캐그니의 비극적인 최후가 던져주는 정서적인 충격의 강렬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귀향한 군인들이 가혹한 실업난의 와중에 속절없이 범죄 조직에 가담하여 밀주사업에 손을 대고, 그러다 끝내는 전락하고 마는 이야기의 시대적인 비극성. 한때 캐그니를 도왔던 변호사 출신 검사는 당돌히 선언한다. “부정한 시대는 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부정하지 않은 시대이니, 지금부터는 부정하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선언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부정한 시대에는 부정한 일을 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투덜댈’ 사람들이 살던 시대의 이야기.
CA167. 커티스 핸슨, 〈8마일〉(2002)
랩의 진수를 관객한테 ‘실감’으로 전달해 냈다는 점. 하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도 결국은 지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복수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랩으로 하는 전투’라는 중요한 개념은 덕분에 그 단순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의미가 다소 축소된 느낌이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일상화된 한계가 어김없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셈.
CA168. 폴 토마스 앤더슨, 〈펀치 드렁크 러브〉(2003)
사랑이라는 것에 제대로 힘이 실린 카운터 펀치를 정통으로 한 방 얻어맞으면 독주(毒酒)에 깊이 취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고, 그러면 당연히 용감해진다. 그래서 ‘조직’들과도 겁 없이 맞설 수 있다. 왜? 그것이 바로 사랑의 가공할 만한 힘이니까. 그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 또는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랑에 부추김을 당하여 저돌적으로 도전해 오는 상대 앞에 반사적으로 기세가 눌려 저도 모르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첫 번째 반응이다.
CA169. 허우 샤오시엔, 〈펑쿠이에서 온 소년〉(1983)
희망 없는 삶, 가난하고 힘없는 부모, 자신의 운명에 대한 들끓는 분노, 그리고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인 소년은 싸움과 방황으로 자기 삶의 내용을 채워나갈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군대에 가야 한다. 대개들 그렇게 생의 한 고비를 넘기고 어른이 되어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또는 그보다도 더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우리네 삶이요, 보통 사람들이 몸소 써내려 가는 미시사(微視史)로서 개인의 삶이 지니는 내용이다.
CA170. 백운학, 〈튜브〉(2003)
이른바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대자본의 메이저 영화라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또는 그래야 한다고 널리 통용되고 있는―요소들을 대부분 다 모아놓았다고 해도 그것들을 모양새 좋게 꿰는 연결 고리가 부실하면 영화는 가야만 하는 방향으로 올곧게 나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이 경우 배우의 연기도 그런 연결 고리의 구실을 하는 요소의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차라리, 주연과 조연의 편차가 거의 없는, 일종의 집체극―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형식을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주연배우의 연기가 이야기를 다이내믹하게 끌고 갈 필요가 있는 국면에서 어딘가 모르게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드는 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