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3
CA161. 남궁선, 〈십개월의 미래〉(2021)
입덧조차 모성을 거부하는 표시라는 이유로 임신부가 비난받던 시절, 샬럿 브론테는 바로 그 임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커트 고베인은 코트니 러브하고 사이에 딸을 낳았지만,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자기 머리에 스스로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 인생을 마감했다. 이런 이야기를 임신한 친구와 임신하지 않은 친구는 왜 서로 주고받은 걸까. 임신한 사실을, 또는 그 임신 자체를 기뻐하고 축하하는 사람이 주변에 하나도 없는 여자가 임신을 감당하는 방법은?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어째서 임신이 감당하거나, 견디거나, 분투하거나, 앓거나, 눈물짓거나, 속상해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설마 아직도 원죄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임신기간이 끝나면, 그러니까 출산하고 나면 다 끝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또 다른 그녀는 이 그녀 앞에 혼잣말하듯 울먹이며 토로한다.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키워놔도 얘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거라고. 이 순간 그녀에게 또는 그녀들에게 사랑은 본디 그렇게 거저 주는 거라고 말해준들, 그녀는 또는 그녀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아이의 태명을 굳이 ‘코스모스’의 반대말인 ‘카오스’로 지어 부른 까닭을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그것이 꼭 코스모스를 지향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아마 이때쯤은 깨닫지 않았을까.
CA162. 허진호, 〈보통의 가족〉(2024)
형제간의 불화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최초의 남녀가 최초의 부모(父母)가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서 그 자체가 인간의 DNA에 각인되어 있는 운명스러운 족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최초의 자녀들이 자매나 남매 또는 오누이가 아니라, 하필이면 형제였던 것일까. 이건 여전히 풀 길 없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홀어머니라는, 짐작의 단서가 될 만한 설정을 해두었지만,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쩌면 충분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형제간의 불화는 해명이 불필요한 불화니까. 형제간의 불화를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자식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사실 그것은 형제의 문제를 엄폐하기 위한 극적 장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자식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읽는 것은 명백히 오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니, 나는 이 영화를 형제의 문제로 오독하고 싶다. 형제 살인 또는 과실치사는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CA163. 이솔희, 〈비닐하우스〉(2023)
치매 환자나 장애인인 노인이 나오는 영화가 어째서 ‘이른바’ ‘노인 문제’를 다룬 영화로 새겨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그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노인이 아니라, 중년의 여인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년 여인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여인이 처해 있는 실존적인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김서형의 연기는 관객이 이 영화의 주제를 노인 문제로 오해하지 않게 할 만큼 충분히 선연하다. 이 선연함이 귀하다.
CA164. 케빈 도노반, 〈턱시도〉(2002)
의복이 그 의복을 입은 사람한테 초능력을 부여한다는 설정은 아이언맨의 경우처럼 마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SF의 영역에 속한다. 이 의복(턱시도)의 기능을 부각하기 위해서 성룡을, 적어도 신체 능력에서만큼은 ‘평범한’ 인물로 설정한 아이디어. 더불어, 생수 제조 판매 회사가 전 세계의 상수원을 오염시킴으로써 그 회사의 생수를 유일하게 ‘식용할 수 있는 물’로 만들어 독점 기업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라는 아이디어. 그 결과로 이 회사는 석유를 능가하는 거대한 수익 창출 구조를 갖추게 된다는 설정. 물론 이 음모는 ‘성룡’의 손으로, 또는 ‘몸’으로, 또는 ‘의복’으로 저지된다, 당연히.
CA165. 첸 카이거, 〈투게더〉(2003)
그 아버지는 왜 그 아이를 바이올린과 더불어 기꺼이 떠안은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바이올린이 그 아이 친부모의 꿈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왜 그 꿈을 자신이 이루어주어야 한다고 믿은 것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하는 데 이 영화는 별 관심이 없다. 실은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탐구가 이 영화의 주된 테마일 터인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