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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31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1

by 김정수

CA151. 로베르토 베니니, 〈피노키오〉(2003)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왜 인형이 사람이 되고 싶어 할까? 그 욕망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에 연유하는 욕망일까? 하지만 피노키오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한 거부의 욕망조차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피노키오는 끝내 사람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사람이 되는 순간 그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결국 그가 욕망한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인형이 사람이 됨으로써 달라진 것은 죽음이다. 피노키오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결국 이 동화의 주제는, 끔찍하지만,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CA152. 전만배,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의 정서에 대한 강박적 애정의 노출. 주인공이 대통령 캐릭터인 경우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의 결이 달라진다. 이 영화에서는 피아노를 치는, 곧 구애(求愛)를 하는 대통령이다. 구애하는 자는 누구든 겸손하고, 간절하고, 절절하며, 진심으로 정성을 다한다. 그것이 구애하는 쪽의 기본 스탠스다. 백성에게 구애하는 군주, 국민에게 구애하는 대통령―. 구애하기를 그만두었거나, 구애하는 데 무관심한, 또는 무관심해진 군주는 폭군이 되고, 대통령은 독재자가 된다.


CA153. 토마스 기슬라손, 〈P.O.V. 관점〉(2002)

관점을 달리하면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하루아침에 극악무도한 죄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일에 함부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다. 아니, 도전하고 스스로 이겼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오해가 확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파탄은 대개 이렇듯 확신이 된 오해가 빚어놓는 것이다.


CA154. 이와이 슌지, 〈피크닉〉(1996)

상처받은 인간이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 보호시설에 수용되었을 때. 그들을 정신병자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누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이 영화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죽임으로써 자기 해방을 기도했던 인물들의 죄의식 섞인 상처를 해부해 보인다.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레메디오스의 음악. 처음부터 끝까지 담장 위에서 담장 위로 위태로운 행보를 계속하는, 정신병원을 몰래 빠져나온 등장인물들. 그 행위 자체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그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켜 주는 장치의 구실을 한다. 선생님이 소변을 보는 기괴한 환영 장면과 마지막에서 여자가 제 머리에 총을 쏘고 절명할 때 주변에 흩뿌려지던 까만 깃털들의 도저한 시각적 아름다움.


CA155. 버디 반 혼, 〈핑크 캐딜락〉(1989)

보석(保釋) 보증인 밑에서 현상범 체포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미드나이트 런〉(1988, 마틴 브레스트)의 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는 그와 똑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와 꽤나 인상적으로 ‘망가진다’. 하지만 그보다는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총기 애호가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가 오히려 더욱 눈길을 끄는 기이한 영화. 총기 ‘문화’라는 말은 온당한 걸까. 그러니까 ‘총기’라는 말에 ‘문화’라는 말을 덧붙여 부르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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