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75
CA371. 장률, 〈이리〉(2008)
큰 폭발과 작은 후일담. 뜨거운 사건과 차가운 기억. 이리와 익산의 사이. 상흔과 현실. 중국어와 한국어. 공중전화를 거는 이주 노동자들. 이불 두 채. 큰 익산과 작은 이리. 진짜 도시와 가짜 도시. 땅 위의 도시와 책상 위의 종이 도시. 택시와 택시 드라이버. 베트남. 대통령 선거. 경로당. 자살. 느닷없는 섹스(들). 커피. 바다. 엔진음 사라진 택시 속의 물소리. 거기서 그는 여자를 죽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죽이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끝내려고? 하지만 그가 실제로 끝낸 것은 목숨이 아니라, 가짜 이리, 곧 책상 위의 종이 이리다. 기억 속의 폭발과 책상 위의 폭발. 폭발이 있었는데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삶. 그 삶의 끔찍함. 그 끔찍함 속으로 또 걸어 들어오는 중국 여인. 오로지 텔레비전 속에서만 열리는 새 시대의 표징. 노인의 첫사랑. 들리지 않는 말소리. 기차. 역. 구두 수선.
CA372. 야마시타 노부히로, 〈린다 린다 린다〉(2005)
그 소녀들은 왜 그토록 잠이 많은 것일까. 아니, 그 시절 자체가 본디 잠이 많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잠은 성장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일까. 소녀들의 공연이 성공하는 것은 어찌 되었든 팔 할은 그 잠의 덕분이다. 불가항력의 잠. 그 잠이 만들어놓은 뜻하지 않은 시간의 틈새로 실패의 불길한 기운들이 슬며시 빠져나가 버리고, 그 빈 공간을 제법 적지 않은 청중이 메운다. 공연의 필수 요소인 청중. 그러니까 청중을 끌어들인 것은 공연의 매력이라기보다는 잠이다. 또는 비다. 비를 피하려고 체육관으로 모여든 학생들이 무대 위에 오른 소녀들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된다는 설정. 배두나는 한국영화 속의 무겁고 때로는 음침함에 가까운 엉뚱함을 꽤나 말끔히 벗은 모습이다. 이 낯설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결국 이 모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구실을 했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그런 구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배두나가 왜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의 소녀들 틈에서 그토록 어설픈 일본어를, 또는 그 일본어만큼이나 어설픈 한국어를 중얼거리며, 또는 얻어들으며 일본노래를 불렀겠는가.
CA373. 멜 깁슨, 〈아포칼립토〉(2006)
문명이 내부에서부터 먼저 무너진다는 윌 듀란트의 명제는 역사란 자멸의 길을 걷게 마련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자멸하기 위해서 인간이 문명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 그렇다면 이 또한 그 흔해 빠진 종말론의 하나인 것일까. 하긴 어쨌거나 인류의 앞날이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태양이 영원한 에너지원이 아닌 이상 지구는 적어도 태양의 종말과 때를 같이하여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전에 인류는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지구를 ‘대대적인 규모로’ 떠날 수 있을까. 그래서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전에 스스로 멸망하는 길을 걷고야 말 것인가. 마야문명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벌이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이전투구를 꼭 자멸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정말 옳고 적확한 규정일까. 그냥 내버려 둔다고 꼭 자멸할까. 어쩌면 자멸이라는 논리로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멜 깁슨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 자멸의 상태를 가차 없이 묘사해 보여주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도 그랬듯이. 묘사의 핍진함, 또는 핍진한 묘사만으로도 일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하나의 보기. 문학이 문체만으로도 일정하게 유의미하듯이. 하지만 이 성취를 가리켜 감히 예술적 성취라고 규정해도 될까.
CA374. 로버트 저메키스, 〈베오울프〉(2007)
왜 모성은 영원하고 부성은 영원하지 않은가.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도 결국 모성 앞에 힘없이 스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베오울프가 죽인 것은 괴물이 아니고 자기 아들이자 자기 자신이며, 결국은 자기 앞날인 것을. 그러니 베오울프가 괴물을 죽이는 행위는 어쩌면 자멸의 몸짓이다. 자멸하지 않고는 끝낼 수 없다는 것. 끝내지 않으면 쉴 수 없다는 것. 그런 끝내기로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한데, 어째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굳이 이런 비극적이고 비장한 옛날 옛적의 영웅담을 택해서 영화 기술의 발전을, 또는 그 발전의 적용을 꾀했을까. 안젤리나 졸리를 이런 모습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갑갑하다. 어쩌면 영화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정말로 꿈의 형태인 것일까. 실제와 거의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CA375. 데니스 일리아디스, 〈왼편 마지막 집〉(2009)
제목이 탁월하다. 이 영화의 제목이 ‘오른편 첫째 집’이었다면 과연 이런 음침한 느낌이 났을까. ‘왼편 마지막’ 집이었기에 그들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다. 이것 말고는 그들이 그런 일을 겪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왼편 마지막’ 집을 택한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하여 무언가 발언을 하기 위해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1960)까지 굳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이것은 그저 가족이 가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이야기, 그뿐이다. 그 아버지가 인간의 몸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의사가 아니었다면 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당한 가족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또 어땠을까(박완서 선생도 ‘일기’인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죽은 자식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지옥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가차 없이 던졌다). 또,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가 그 나이가 아니었다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서 그들의 복수 또는 응징과 가족 지키기가 마침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또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