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97
CA481. 김기영, 〈충녀〉(1972)
정신병원과 학교. 환자복과 교복. 감금 상태. ‘관리되고’ 있는 사람들. 정신과 청춘.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천천히 살해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생물학자의 지극히 ‘생물학적인’ 해석. 아버지가 죽은 딸. 그 딸더러 요정(料亭)에 나가라고 말하는 엄마. 대학을 나와야 하는 오빠. 가장이 죽으면 길바닥으로 나앉아야 하는 불안한 삶의 상태. 주차장이 없는 아파트. 변두리 동네 비탈길에 세워진 아파트. 돈을 뜯어내는 쪽과 뜯기는 쪽. 돈을 빌리는 쪽과 빌려주는 쪽. 돈을 쓰는 쪽과 돈을 받는 쪽. 권력은 어느 쪽에 있는가. 붉은 조명에 대한 선호. 인구 3천만 시대의 초상. 돈은 아무나 버는 게 아니다. 세상은 프로만이 살 수 있다. 혈맹. 시골에서 올라온 숫보기. 여자한테 함부로 손찌검하는 남자들의 시대. 의사가 만능이라는 신화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김기영은 어째서 남궁원을 캐스팅했을까. 저하고 살아주세요. 조명의 차이, 시대의 차이. 도심의 풍경이 황량한 까닭. 술집 여자와 아내를 대결시키는 남편. 경제력의 차이, 계급의 차이. 쥐에 대한 선호. 쥐를 선물로 주고받는 일. 엄마한테서 배운 첩살이. 본처한테서 남편을 빼앗는 기술.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폭력에는 절대 반대라는 것. 여의도 광장. 식모가 있는 집. ‘작은댁’이라는 호칭. 폭행이 만연한 사회. 부잣집에는 왜 도자기가 많을까. 언제부터 그것이 부자들의 기표가 되었을까. 50대 남자. 중년의 남자하고 살려면 의학박사가 되어야 한다. 아내한테 월급을 받는 남편. 침실의 붉은 조명. 아내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 첩. 삼대독자. 대를 이을 의무라는 것. 가정을 지킬 의무와 대를 이을 의무의 충돌 지점.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 당시 서울 밤거리의, 지금과는 사뭇 다른, 한없이 어두운 야경. 단역의 이대근. 단독주택과 아파트. 부촌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지어진 고급 저택의 황량함. 육식과 채식에 대한 편견. 어느 쪽이 더 좋은가. 이분법. 조화에 대한 사고의 결여. 쥐 꿈을 꾸면 아이를 갖는다는 미신.
CA482. 테리 길리엄,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
히스 레저,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 한 영화 속에서 이 네 배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 영화가 배우를 기리는 방식, 관객이 배우를 기리는 방식, 배우가 배우를 기리는 방식.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가 잊지 못하는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언제나 배우를 기리는 방식에 기대고 있었던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나는 언제나 그의 영화를, 배우를 보기 위해서 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로버트 드 니로에 한창 빠져 있던 무렵, 어렵사리 만났던 〈브라질〉(1985). 거기에 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그 영화를 그토록 간절히 찾아보려고 애썼을까. 〈12 몽키즈〉(1995)의 브루스 윌리스와 브래드 피트, 〈그림 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의 맷 데이먼과 히스 레저, 〈피셔 킹〉(1991)의 로빈 윌리암스와 제프 브리지스. 물론 이 사례들은 그의 영화에서 꼭 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를 스타 시스템에 기대고 있는 감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그런 배우들이 그의 영화 속으로 들어오면 언제나 기존의 이미지하고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을 나는 감독의 솜씨 탓으로 여겼고, 언제나 그의 영화를 볼 때는 적어도 어느 만큼은 그것을 기대했으니까. 그래서 거울 속으로 들어갔을 때 히스 레저가 조니 뎁과 주드 로와 콜린 파렐의 외모로 차례차례 변하는 과정을 나는 어지간히도 즐겁게 체험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추모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지극히 마땅하다고 해야겠지. 그의 영화가 안겨주는 해방감은 〈아바타〉(2009, 제임스 카메론)가 강제하는 시각적인 해방감과는 또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 해방감만큼은 다른 숱한 단점들을 벌충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역시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는 내 평가다.
CA483. 조나단 모스토우, 〈써로게이트〉(2009)
대체(代替) 인간. 경험의 대여 또는 전가. 위험 없는 일상과 정체성의 교환. 진짜 몸과 가짜 몸. 어느 것이 진정한 나 자신인가. 현실과 소망. 욕망의 표현으로서 로봇이라는 것. 유닛과 그 유닛의 주인. 역시 ‘싱크’. 아바타의 ‘링크’와 에반게리온의 ‘싱크’. 가짜로 살다 보면 진짜로 사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결국 가짜를 추구하게 된다? 진짜와 대화하고 싶으면 가짜한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 가짜를 통해야만 진짜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 남용과 중독의 문제. 기계와 접속하는 순간 인간이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 또는 윤리적 반성. 휴먼과 로봇. 하지만 인간은 과연 로봇을 버리고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그럴 만큼 인간의 윤리는 강한가. 심장박동도, 숨쉬기도, 체온도, 나아가 눈물도 없는 세상. 인간의 은둔과 대체 인간의 활보. 약물로 연명하는 딱한 인간의 육체와 활기차게 시공을 가로지르는 써로게이트의 몸체. 에반게리온, 아바타, 그리고 써로게이트. 싱크와 링크, 그리고 합체와 결합. 지금 어째서 이것이 테마인가. 다치지 않는 것은 육체뿐. 하지만 다치지 않는 것과 병들지 않는 것은 다르다. 다치지는 않아도 병은 드는 인간의 육체. 그보다 인간의 마음, 정신, 영혼, 그리고 관계. 몸은 병들고, 마음은 상하고, 정신은 피폐해지고, 영혼은 증발하고, 관계는 파괴된다. 물리적인 세상에 대한 공포가 인간을 이끌어가는 종착점이라는 선언. 하지만 이것은 사이버 세상이 아니다. 〈매트릭스〉(1999)와 다른 점. 싱크와 링크, 결합과 합체에 대한 문제 제기. 관계 맺기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관계 단절의 메커니즘.
CA484. 롭 마셜, 〈나인〉(2009)
9에서 8과 2분의 1을 빼면? 9하고 8과 2분의 1 사이. 펠리니의 8과 2분의 1과 롭 마셜의 나인. 이 차이는? 귀도가 창작의 고통과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외상에 시달릴 때 그것은 펠리니의 것인가, 롭 마셜이나 다른 감독들의 것인가. 펠리니의 영화를 볼 때와, 그것을 무대 위에 올린 뮤지컬을 볼 때와, 그 영화가 아닌 그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를 볼 때의 차이. 그것은 펠리니의 고민인가, 다른 누구의 고민인가. 그것이 펠리니의 고민일 때와 펠리니가 아닌 그 누구의 고민일 때의 다름. 〈나인〉의 귀도를 펠리니의 분신으로 간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의 차이. 펠리니의 영화를 볼 때와 롭 마셜의 영화를 볼 때의 차이. 2분의 1을 빼고 더한 차이. 아버지 부재의 현장. 어째서 귀도의 주변에는 온통 여자들뿐인가. 소피아 로렌과 주디 덴치의 차이. 어머니와 어머니가 아닌 여자들의 차이. 아내와 아내가 아닌 여자들의 차이. 두 해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다시 시작하는 귀도가 그동안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서 벗어났는가를 살펴야 하는 까닭. 새로 한 편의 영화를 시작할 때마다 그때까지의 모든 것과 깡그리 결별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창작의 고통은 곧 결별의 고통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결별의 고통이 없는 창작은 모조리 가짜라는 것.
CA485. 필립 그로닝, 〈위대한 침묵〉(2005)
수도원을 금욕적인 곳이라고 말할 때 이 금욕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그들도 먹고, 마시고, 쉬고, 논다. 하지만 과연 먹고, 마시고, 쉬고, 노는 것이 진짜 ‘금욕’의 ‘욕’에 해당하는 것일까. 실은 말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명상하고, 수도원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 자체가 가장 깊은 ‘욕’이 아닐까. 세상에 진짜 ‘금욕’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금욕’이 누군가에게는 ‘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제목을 ‘위대한 침묵 속으로’가 아닌 ‘위대한 침묵’이라는 명사형으로 굳이 옮긴 것은 관객을 어느 만큼 오해로 이끈다. ‘위대한 침묵’이라고 했을 때 관객은 구경꾼이 되고, ‘위대한 침묵 속으로’라고 했을 때 관객은 체험의 주체가 된다. 요컨대 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과 이 영화를 체험하러 가는 사람 사이의 분명한 차이. 침묵은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다. 겪은 사람은 영화가 끝났을 때 그 겪음의 단절이 한없이 아쉽다. 이 ‘현상’이 귀하다. 어디선가 돈을 주고 사 왔다는 증거로서 각각의 과일에 붙어 있는 상표, 수도사들의 머리를 깎는 전기 바리캉, 설거지하는 데 쓰이는 세제, 내가 제대로 본 것이라면. 촛불이 아닌 전등,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 이 문명의 찌꺼기들. 이 기묘한 부조화. 진짜 금욕이 아닌 진짜 쾌락의 장소. 오해와 확인의 거리. 한없이 맑디맑은 얼굴과 깊디깊은 무욕의 눈동자, 그 바탕과 기원. 맹인인 노 수도사의 유일한 발언. 죽음 앞에 겸손한 인간의 모습. 소리. 시간.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 별자리의 운행. 비와 눈. 그리고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