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16
CA576.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중국식 룰렛〉(1976)
일종의 ‘진실 게임’을 하는 동안 불륜과 결혼 사이의 간극은 더없이 섬뜩하게 제 정체를 노출한다. 그 좁힐 수 없음의 비극 속에 한 소녀는 어머니의 손으로 사살당한다. 물론 이 사살은 그 소녀의 언어장애인 가정교사(또는 유모?)의 죽음으로 대변된다. 장애인 딸에게 자신의 불륜을 들킨 부모의 영혼이 자리할 곳은 과연 있는가?
CA577.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쿼렐리(케렐)〉(1982)
양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이성애라는 삼분법을 적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온전히 해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 있다. 수용과 거부의 여부를 떠나서 이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니 군(軍)과 사창가라는 가장 극단적인, 또 가장 극단적으로 나뉜 성(性)의 지대에서 인간은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방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와중에서 살인과 남색이 자행되는 것은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남자와 항문성교를 하는 것의 쾌락을 처음 알았다고 고백하는 수병 쿼렐리(케렐)의 태도가 도덕적으로 온당한 것은 그래서다.
CA578.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3월인 어느 해에〉(1978)
13월은 점성술에서 재난을 암시한다. 말 그대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 남자(또는 여자?)에게 인생은 끔찍한 재난이다. 그는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어느 집단에도 그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 누구도―남자도 여자도 남편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구도 애인도―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신사복을 입고, 옛날의 아내와 딸 앞에 나타나 다시 시작하자고, 남편 노릇과 아버지 노릇을 잘할 테니 그전처럼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애원하는 대목은 가공할 만한 슬픈 장면이다. 영화 사상 가장 슬프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는 이미 남편도 아버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일 뿐이지만, 이 ‘그’는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이 비극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3개월 전에 ‘남성’ 연인을 잃은 감독 파스빈더의 섬뜩한 내면 풍경, 또는 그 내면 풍경의 섬뜩한 노출.
CA579.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제3세대〉(1979)
파스빈더 자신은 ‘제3세대’를 ‘테러리스트 세대’라고 규정했다. 민주주의조차 ‘주어진’ 것이어서 그저 감사할 도리밖에는 없는 이 딱한 세대에게 그들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것으로 허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그들은 테러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아니, 테러를 저지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끊임없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암호로 읊조려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CA580.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사랑만이라도 해줘〉(1976)
전후 피폐한 독일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성장한 젊은이의 사고(思考) 속에 ‘물질적인 봉사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라는 관념이 심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부모한테조차 언제나 무엇이든 주어야만 그 대가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끔찍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 부모는 자식에게 바로 ‘그런’ 부모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아내한테도 온갖 경제적 궁핍을 감수하면서도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물로 사주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한다. 자신을 그렇게 키운 아버지와 닮은 술집 주인을 때려죽이는 지점에까지 이르지 않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내면 풍경의 묘사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그에 합당한 강도의 주목을 강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