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17
CA58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절망: 양지로의 여행〉(1978)
자신을 죽일 수 없을 때 그는 자신과 똑 닮은, 아니, 자신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혀서 죽인다. 그리고 세상이 자신이 죽었다고 믿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企圖)가 지닌 허점을 너무도 쉽고 정확하게 파악한다. 세상의 온갖 구속에서 자유롭기를 희구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살인으로 말미암아 가장 끔찍한 구속의 멍에를 뒤집어써야 할 운명에 처한 셈이다. 자유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 해도. 그는 처음부터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자유란 한갓 ‘양지(陽地)’라는 찰나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 것을.
CA582.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왜 R 씨는 미쳐 날뛰는가?〉(1970)
분명히 해두자. R 씨는 미쳐서 날뛴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에 불과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그는 현대인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하나의 모델인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그처럼 한바탕 참극을 연출한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는 존재라고 해야 옳다.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이므로. 따라서 그 참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이 의미를 얻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다.
CA583.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폭스와 그의 친구들〉(1975)
사랑에 연연하는 순진한 인간의 파멸이 이 영화의 주제다. 그러니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러니까 감독의, 예술가의 선택이다, 이것은.
CA584.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1972)
그녀의 눈물 또한 동성애자만의 특수한 눈물이 아니다. 버림받은 세상 모든 연인의 눈물과 그녀의 눈물은 전혀 동질이며 등가다.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를 특화하지 않으려는 이와 같은 인식이다. “독일에서는 변하는 게 별로 없다.”
CA585.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폰타네의 에피브리스트〉(1974)
봉건주의 시대의 여성 수난사는 동서(東西)가 다르지 않다. 여기에 고금(古今)조차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이 영화는 강제한다. 이 점이 이 영화의 특별한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