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의 지도

데리다, 들뢰즈 그리고 저의 생각을.....

by 김준완

〈 파리의 오후, 환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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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낡은 탁자 위
식어버린 에스프레소 두 잔이
서로의 테두리를 침범하며 웅성거린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백발의 목소리는
찻잔의 밑바닥에서
잡히지 않는 흔적을 건져 올리고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다른 목소리는
소용돌이 속에
지도를 그려 넣는다


​정적


​이내 카페는 다시 시끄러워지고
한 명은 벽 안을 가리키고
한 명은 벽 밖을 가리킨다
나는 식은 커피를 들이켜고
입술에 남은 검은 얼룩을 닦지 않는다


​목소리만 남아
카페를 채운다
문을 밀고 나온다


​보도블록은 차가운 침묵으로 젖어 있고
등 뒤의 소리는
유리창에 부딪혀 잘게 부서진다


​한 목소리는
신문지 사이를 떠돌며
읽히지 않는 문장들의 그림자를 끌고 가고
다른 목소리는
지하철 입구의 바람을 타고
지도를 지우며 달아난다


​나는 걷는다
발자국은
금세 젖어 사라지거나
어디론가 이어진다


​환청은
이제 내 안에서 울린다
벽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벽이 무너지는 소리인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빈 찻잔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단어를 해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내 것도
그들의 것도 아니다


​파리의 노을 속으로
천천히 번져간다


〈 보랏빛 환영 〉


​노을 속으로 번져가던 소리들이
갑자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파리의 거리가 멈춰 서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환청을 자르던 노인이
보도블록 위에 주저앉아 있다

그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투명한 메스로
공기를 가른다


​잘려 나간 파편들이
허공에서 반짝이며 흩어지고
손짓이 빨라질수록
하늘은
검붉은 노을을 토해내며
보라색으로 번진다


​나는 코트 깃을 세우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 발자국이 지워지는 소리가
노인의 메스 끝에서
비명처럼 잘려 나간다


〈 보라색 이후 〉


​노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잘려 나간 소리들만
늦은 빛처럼 떠다닌다


나는 멈춰 서서
손등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다


발자국은 사라졌고
길은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어디선가 계속 걸어가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무언가가 나를 지나간다


​보라색이 식어가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옮겨졌다는 것을


​그것은 이제
내 안쪽의 어딘가에서
천천히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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