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 로봇 사용 설명서 >
평소에는 일반 모드로 설정해두고 마감 시즌이 다가오면 마감 모드로 변경하세요. 일반 모드에서는 인스턴트 커피를 연료로 주입해도 무방하지만, 마감 모드에는 반드시 핸드드립 커피를 연료로 주입해야 소프트웨어가 버퍼링 없이 잘 돌아갑니다. 마감 모드는 일반 제품의 파워 모드와 같은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손목이나 어깨, 허리에서 통증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붙여줄 파스와, 가끔 자기 뽕에 취해 점심을 거르는 어리석은 행동에 대비한 다양한 간식거리나 간단한 식사를 미리 준비하면 좋습니다. 특히 유의할 점은 시간 개념이 ‘디데이’를 중심으로 변경되므로, 그 시일 안에 잡히는 모든 약속은 마감 후로 미뤄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 반드시 마감 일주일 전에 설정해야 과부하 고장이 나지 않습니다.
위 내용은 에디터를 로봇에 빗대 작성해본 사용설명서다. 장난삼아 동료들과 한 마디씩 툭툭 던지던 농담을 재구성했다. 꽤 유쾌하지 않은가?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이렇게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재치를 발휘한다. 역시 희극의 힘이란. 직업 특성상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업무 총력 기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노동의 산물. 이 시기에는 편집장, 에디터, 디자이너 어느 한 명도 빠짐없이 잡지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을 쏟는다. 가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스스로 인간성을 반성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성은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가리킨다. ‘인간성 제로’라는 표현이 ‘인격이 좋지 않다’로 통용되듯 말이다. 30여 번의 마감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게임 세계로 비유하면 에디터의 인간성은 ‘마력MP’에 가깝다. 어느 정도 마력이 충전돼야 스킬을 사용할 수 있듯 심리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비례해 인간성이 지옥까지 추락한다. 게임에서 마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쉬기’와 ‘물약’. 쉬기는 충분한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마감하는 입장에선 마감이 끝나야 가능하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마력이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건 과부하의 원인이 되므로, 결국 최선의 선택은 물약이다. 섭취하자마자 바로 능력치를 회복하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신체 건강한 20대 초중반에는 ‘술’이 보약이라고 허세를 떨었는데, 지금은 담백하게 ‘집밥’이면 된다. 그것도 내 노력이 ‘1’도 들어가지 않은 엄마의 노동으로 차려진 한 상이면 충분하다. (불효녀는 웁니다, 어머니.)
마감 시즌만 되면 이것저것 다 귀찮기만 해서 잘 챙겨 먹지 않는데, 누군가 밥상을 차려준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밥솥에서 방금 푸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밥에 싱싱한 굴을 섞은 짭쪼름하고 매콤한겉절이를 올려 먹은 한 입으로 인간성 한 숟갈 회복. 살짝 데쳐 짭조름하게 간을 맞춘 시금치로 인간성 한 젓가락 회복. 참기름에 미역과 소고기를 달달 볶아 고소하게 끓인 미역국으로 인간성 한그릇 회복. 침대에 누워서 볼록 튀어나온 윗배를 두드리며 핸드폰 만지작거리다 잠들면 다음날 아침 100퍼센트 충전 완료. 그렇게나는 다시 사회인이 된다.
만약 지금 당신이 싫어하는 친구, 동료, 지인 등이 있다면 집밥 한 그릇 권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요리 반찬, 국, 밥을 마주했을 때 밀려오는 감동을 새침하게 받아칠 위인은 세상에 없다. 집밥을 한 숟갈 뜨는 행동만으로도 얼어붙은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