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자골목 퇴근길의 최후
또 다시 밤이 왔다. 건물 뒤로 해가 지고 그림자가 어둠에 먹히면 하던 일을 정리하고 퇴근을 준비한다. 그간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주말에는피곤해서하지않았던일들을조금씩이라도해보자고 출근길에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결국 퇴근이 다가오면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집에 가고 싶어진다. 다행인 건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날에는조금이라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전철역부터 집까지 열심히 걷는다는 거.
그런데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데 걸리는 15분 동안 수많은 유혹의 손길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역을 나오면 바로 옆에 시장이있고, 시장 입구에 다다르면 바로 먹자골목이 이어진다. 그 골목 끝에 집이 있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 이 길을반드시지나야하는데, 퇴근 후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걸어야 하는 내겐 곤욕이 따로 없다.
시장에서는 가게 문을 닫은 상인들이 삼삼오오 자리 잡고 앉아 금방 익힌 족발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따라마신다. 분식집에서 팔다 남은 시뻘건 떡볶이와 푹 퍼진 어묵을 나눠 먹으며 캔맥주를 마시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먹자골목은 더하다. 고깃집에서는 매일 불이 잘 붙은 숯불에 고기 굽는 냄새가,이자카야에서는 양념에 담갔던 꼬치 굽는 냄새가 난다. 야구 경기라도 열리는 날에는 치킨집이 무서워 차라리 버스를 타는 게 낫다. 고소한 기름 냄새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닫아두던 테라스를 활짝 열어 길가에도 간이 테이블을 펼쳐 손님을 받는데, 간이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이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군침이 돈다. 이런저런 먹거리 풍경을 구경하며 유혹의 손길을 열심히 뿌리친 후 가장 마지막에 편의점을 마주한다. 쏟아지는 조명 빛에 잠시 몽롱해진다. 정신차리고 보면 이미 손에 캔맥주가 들려있다. (젠장.)
모두가 잠든 밤, 무드등과 영화 <라따뚜이>만 켜두고 방문을 닫았다. 허구한 날 술 먹는다며 잔소리할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쓰고 아주 조심스럽게 맥주캔을 땄다. 숨죽이고 거실 의기척을살핀후시원하게한모금.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지는 탄산을 삼키고 골까지 퍼지는 짜릿함을 만끽한 후에야 입안이 씁쓸해진다. 밤이깊어과자는먹고싶지않았던터라괜찮 은 안줏거리가 없나 고민하던 차에 영화에서 주인공 생쥐가 형에 게 과일과 치즈를 쥐여주며 먹어보라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고 보 니 엄마가 얼마 전에 열매가 맺혔다며 집안에 들여놓은 방울토마토 나무가 생각났다. 며칠 전 사다 놓은 치즈도 있겠다, 좀도둑처럼 까치발들고 거실로 나가 현관에 놓여 있는 방울토마토나무로 접근했다.
맥주 한 모금, 치즈 한 입, 방울토마토 하나. 비록 모차렐라 치즈가 아니고, 바질이나 발사믹 소스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맥주의 쓴맛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 내 등짝을 후려쳤다.
“쥐새끼처럼 방울토마토를 훔쳐 먹어?” 아니라고 우겨봤지만, 셜록 홈즈가 따로 없다. “방울토마토가 부실하게 달려있길래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네 방에서 꽁지가 나오더라.”
새삼깨달았다. 세상에완전범죄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