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상의 맛 14화

가족 질병 징크스

아프면 빵이 먹고 싶은 가족

by Becky

우리 집 창고에는 작은 오븐이 하나 있다. 창고에는 냉장고, 김치냉장고, 멀쩡해서 버리지 못한 세탁기, 전자레인지, 생활용품 등 온갖 것들이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다. 실은 오븐도 버린 줄 알고 지내다가 새 샴푸를 찾으려 창고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했다. 오븐이 무척 작은 데다가 다림질할 때 옷 아래 받치는 두꺼운 깔개로 오븐을 덮어 놓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오븐은 수납장이 아니지만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었다. 주로 명절 선물로 받은 비누나 샴푸 같은 것들이 가득했고 어쩌다 딸려 들어간 듯한 참치 캔 하나가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걸 보니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모양이다.


집에 오븐이 있으니 분명 오븐을 사용해 음식을 해 먹었던 기억 내지 추억이 떠올라야 하는데, 한 줌 실마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잡동사니를 모두 꺼내 세탁기 안에 넣어둔 후 (이미 세탁기속은 휴지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븐을 부엌으로 옮겼다. 먼지 나게 그건 왜 꺼내 왔냐고 핀잔 놓는 엄마를 뒤로하고 우리 집에 왜 오븐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왜있는거니, 오븐아?”


엄마가 쿠키나 파이 같은 걸 해줬을 리 없다. 우리 가족은 원래 빵이나 쿠키 같은 밀가루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잘 지어 윤기도는 흰 밥 한 그릇이면 되는 ‘밥심 가족’이기도 하고, 파이나 타르트 같은 디저트를 애써 찾아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족 중 누군가가 몸이 아파 앓아눕는 징크스가 있어 최대한 피하는 편이다. 실제로 엄마는 “몸이 아프려나? 요즘 왜 이렇게 빵이 먹고 싶지?”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 넘겼지만, 국수를 제외하고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장바구니에서 빵 비스름한 음식을 꺼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몸살이나 감기를 앓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잘 아프지 않던 아빠가 요 몇 년 사이 수술대에 두 번 올랐는데,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 1층에 있는 빵집에서 에그 타르

트와 커피를 사다 나르기도 했다. (하루는 깜빡하고 안 사 갔더니, 빵집 문 닫기 전에 내려가 빨리 내려가서 사 오라며 등 떠밀린 적 도있다.)


집안 내력인지 징크스인지, 나도 언제부터인가 생리 예정일이 가까워지거나 몸이 아프면 막 구워 겉이 바삭한, 한입 베어 물면 부스러기가 후드둑 떨어지는 페이스트리 한 접시를 혼자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블루베리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음 날 생리를 하고, 과일 타르트가 먹고 싶으면 다음 날 감기를 앓고 하지는 않으니 오해 없길!) 달달하고 바삭한 빵을 먹고 나면 세포들이 축제를 벌이느라 경계를 푸는지 온갖 병이 들이닥친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고생하는 건 대체로 남자친구나 친구들이다. 평소에는 케이크나 파이 같은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불쑥 ‘복숭아 타르트가 먹고 싶어’ ‘페이스트리 좀 사다 줘’ ‘거기 바나나 파이 맛있다던데 먹으러 가자’는 둥 메시지를 보내고, 일정이 안 맞거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무척 서운해 한다.


엄마는 오븐의 출처를 밝히려 애쓰는 내 옆에 서서 처음 보는 것 마냥 이리저리 살폈다. “이거 가스레인지 사는데 사은품으로 준다 해서 받은 거야.” 가스레인지가 나랑 동갑이니 오븐 역시 20년은 훌쩍 넘은 골동품이다. 반신반의로 시험 삼아 작동해 보니 세월이 무색하게 잘 돌아갔다. 엄마는 식탁을 가볍게 탁, 치며 추석 때 시골에서 가져온 사과가 많이 남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잘 됐다고 부랴부랴 창고에서 갖은 도구를 꺼냈다. 강력분 밀가루, 계란, 사과, 버터, 스테인리스 양푼, 파이 팬,고무 주걱. 어느새 나는 박력분 밀가루 한 봉지와 계란, 버터를 담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을 들고 있었다. “나는 사과를 썰 테니 너는 반죽을 해.” 양푼과 엄마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며 구시렁댔 다. 대꾸도 하지 않던 엄마가 도마에 고구마를 올려 중식 칼로 내

리치는 모습을 본 후 자리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켜고 조리법을 뒤졌다.


타르트 한 접시를 만들고 나니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 반죽하며날린밀가루가장판, 벽, 싱크대에잔뜩묻었고, 그와중에 눈이 잘 안 보이는 우리 집 노견이 밀가루 봉지를 엎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됐다. 엄마가 구운 반죽에 얇게 썬 사과를 채우고 다시 오븐에 넣어 굽는 동안 또 반죽을 만들었다. 오븐이 작아서 한 번에 하나씩밖에 안 들어갔고, 반죽 양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하나 더 만들었다. 반죽을 마무리했을 때쯤 첫 타르트가 완성됐다. 잼

대신 꿀을 발라 나름대로 완벽한 마무리. 밀가루 반죽이 묻은 손으로타르트한조각을덥석집어먹었다. 오븐에서수분을 빼앗긴 사과가 무척 푸석했지만, 덕분에 단맛이 더 깊었고 은은하게 상큼한 향이 돌았다. 잼 대신 쓴 꿀도 꾸덕꾸덕하게 잘 굳어 고소하게 구워진 반죽과 찰떡궁합이었다.


타르트를 먹은 다음 날, 몸살을 앓았다. 반죽에, 뒷정리에 몸이 부서질 듯 고생해서 그런지 다음날 결국 파스를 미라 마냥 덕지덕지 붙이고 누워서 반나절은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호되게 당했으면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여전히 타르트나 파이 같은 디저트가 구미에 당기면 다시 창고에 들어간 오븐을 떠올린다. 밖에서 사 먹으면 편하지만 직접 만들면 내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 이번주말에는오븐을꺼내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