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발소의 추억

이발소 그림

내가 언제부터 이발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일까?...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서 간 것은 아닐까?....



군청 정문에서 시작된 길의 오른편에 우리가 세든 집이 있었고

그 집에서 스무 걸음쯤 더 걸어 내려간 건너편에 길모퉁이에 이발소가 하나 있었는데

내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나는 거기서 머리를 깎았다.

사내 녀석들은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이발소 의자 팔걸이에 판자를 얹고

그 판자 위에 앉아서 머리를 깎았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이발소 아저씨는 판자를 대지 않고 나를 그냥 의자에 앉게 했다.

컸다고 대접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다음번에 갔을 때에는 다시 판자를 깔고 거기에 앉게 하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상했다.

그 이후로 관찰해 보니

그냥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판자 위에 앉히기도 하고

판자 없이 그냥 의자에 앉히기도 하는 것이었다.

판자를 얹어 그 위에 앉히기에도,

판자 없이 그냥 의자에 앉히기에도 어중간한 신장이었기 때문이었다.


60년대 그때에는 면도를 하기 위해서는

주인아저씨가 컵에 비누를 넣고 물을 조금 붓고는

커다란 붓 같이 생긴 것으로 거품을 내서

손님의 얼굴에 바르고 면도를 했었다.

그렇게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 신기했었고

주인아저씨가 마술사 같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주인아저씨는

벽에 걸린 넓은 가죽띠(혁대)에 면도칼을 써억써억 갈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아저씨가 조금쯤은 무서웠다.


머리를 깎고 난 후 머리 감는 곳 부근에는 아주 작은 미니 욕조 같은 것이 있고

거기에 물을 담아두었다.

그래서 머리를 깎은 후에 머리를 감을 때에는

함석으로 만든 화초에 물을 주는 물뿌리개 같은 것으로 물을 떠서 머리에 부어주었다.

수도가 없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머리를 감는 곳에는 나무로 만든 틀이 있었다.

머리를 감을 때 두 손을 얹을 수 있어서

머리 감는 동안에 생길 수 있는 피로를 줄일 수 있게 만든 나무틀이었다.

나중에 커서 보니까 마치 단두대의 아랫부분 같아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가 되면

이발학원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이발학원에서 이발을 배우는 학생들의 실습용 머리가 되어주는 것인데

머리 깎는 비용이 매우 저렴했다.

동네 이발소에 간다고 이발비를 받아서는

이발학원에 가서 머리를 깎으면 차액이 발생하는데

그 차액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군것질을 하고 싶을 때......


또 어떤 때에는 아주 아주 허름한 이발소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역시 차액이 목적.

그런데 어쩌다 잘못 찾아가게 되면

위생 관념이 형편없는 이발소를 가게 되기도 하고

그 결과 머리를 깎고 나서 머리에 피부병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것을 '기계독'이라고 했다.

잘못해서 기계독이 오르게 되면 어머니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차액'도 알게 되어 몹시 꾸중을 듣게 된다.

배(이발비) 보다 배꼽(피부병 치료비)이 더 큰 상황이 발생했으니

몹시 속이 상하셨을게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빡빡머리를 하게 된다.

그 어린 나이에도 긴 머리카락이 하얀 덮개 위에 툭 툭 떨어질 때에는 숙연했었다.

빡빡머리가 된 그날,

뭔가 억울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갔더니

나 보다 두 살 위인 누나가 내 머리를 만져보자고 했다.

곧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여학생인 누나는 빡빡머리의 촉감이 궁금했던 것이다.

누나가 그 누구의 빡빡머리를 만져볼 수 있었을 것인가 말이다.

동생 머리니까 만져볼 수 있었겠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이발소 아저씨가 면도를 해주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면도를 하게 되어서 당황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인으로 대접받는 것 같아서 내심 흐뭇했었다.

그런데 다음번에 갔을 때에는 면도를 해주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판자 위에 앉기도 하고 판자 없이 의자에 앉기도 하던

그 혼돈의 시절을 겼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훈련소에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매우 짧게 깎고 왔을 때

그렇게 짧은 머리의 나를 처음 보는 아내는 몹시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한 번 만져보고 싶어 했다.

중학교 때 누나의 심정이었으리라.

아내도 짧은 머리의 내 머리를 만지면서 신기해했다.


일부 이발소가 퇴폐의 방향으로 흐르면서

나도 미장원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미장원으로 가는 나 자신에 대해

내적 저항감을 상당히 많이 느껴야 했었다.


또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헤어컷 전문 체인이 생겨났다.

그러나 거기서는 면도가 없어졌다.


이렇게 내 기억 속의 이발소는 흘러왔다.



그래도

'이발소' 하면

그 무엇보다도

'이발소 그림'이 백미다.


어미돼지와 그 젖을 먹고 있는 수많은 새끼돼지.

알프스 산맥 같이 뾰족한 산에 하얀 눈이 덮였는데

그 옆에는 우리나라식 물레방아와 한복을 입은 여인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푸시킨의 시귀.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


생각만 해도 미소를 짓게 되는 '이발소 그림'.

이제 내 기억 속의 이발소는 그 이발소 그림 액자로만 남게 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