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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오스 이비 Oct 04. 2021

또래보다 못해도 괜찮아

아이가 특별히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특정 행동이나 발육이 늦는 경우가 있다.  


까돌이는 소변을 늦게 가렸다. 생후 10개월쯤 걷기에 성공했고 그쯤 “엄마”라는 말을 하기 시작할 정도로 다른 것들은 매우 빨랐는데 유독 기저귀는 오랫동안 찼다. 반대로 까숙이는 소변을 빨리 가렸는데 말하는 것과 걷는 것은 누나들보다 늦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잘한다. 


그럼 왜 아이들 마다 성장 발육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연습 부족이다. 이는 단순히 성장 발육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남들보다 못하는 것은 남들보다 잘할 만큼 안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어서,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등 그 이유는 매우 많겠지만 말이다.  


그럼 왜 못해도 괜찮을까. 


내 아이가 또래보다 못한다고 인지한 시점은 아이가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물론 부모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훨씬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또래보다 조금 늦어 보여도 얼마든지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시작 단계부터 또래 아이보다 늦어지면 계속 늦어질 것이고 그 차이는 무한대로 벌어져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흥미를 느껴 또래보다 빠르게 시작한 행동도 꾸준히 하지 않는 이상 좀 늦게 시작하더라도 꾸준히 연습한 아이에게 결국은 뒤처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노력에 의한 성과는 노력을 할 때마다 바로 나타나지 않아 노력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기도 하고 실증을 느끼게 한다. 심한 경우는 포기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과라는 것은 노력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축적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발견하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지는 노력할 때마다 다르며, 성과가 나타나 봐야 비로소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더더욱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 어렵다. 즉 노력을 할 때 얼마만큼의 노력을 더 해야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노력하는 과정이 힘든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는 것이 재미있는 놀이 과정으로 느낀다면 덜 힘들 것이고, 몇 번의 성공한 경험이 있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성공의 기쁨을 위해 더욱 노력할 수 있다. 여기에 부모의 적절한 관심과 칭찬 그리고 동기부여가 있다면 더욱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흥미를 못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의 필요에 의해서 아이에게 억지로 시키는 행동은 아이에게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더욱이 그런 기억들로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일, 부모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절대로 억지로 시켜서는 안 된다. 


설사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시작한 일을 아이가 잘한다 하더라도, 이는 내 아이를 또래 아이들과 모든 행동을 동일하게 자라길 바라는 것과 같다. 또래와 비교해서 전혀 특색이 없는 평범한 아이로 키우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하루 24시간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또래보다 못하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아이가 또래보다 잘하는 것을 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아이들이 이와 같이 한다면 결국은 내 아이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없는 고만고만한 수준의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능력이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 특히나 요즘 같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새로운 활용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이 시기에 다른 사람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는 결코 독립 객체로 살아남기 힘들다. 설사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매 순간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더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삶을 과연 우리 아이들이 원할까? 아니면 여러분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기를 원합니까? 


아이 인생의 주인공은 아이 자신이어야 한다. 결코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의 인생을 부모가 설계해서는 안 된다. 또래보다 못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또래보다 못하는 행동을 또래에 맞추는 것보다 또래보다 잘하는 행동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또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과정에서 슬럼프가 왔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조력자인 부모의 역할이다. 그리고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에게 억지로 시키는 것보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는 것이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도 좋게 유지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위 천재라는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성장 발육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남들보다 아주 늦게 말을 배웠다. 그래서 가족들은 아인슈타인이 말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늦은 언어의 발달로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적인 현상까지도 아인슈타인은 신기하다고 감탄하면서 관찰할 수 있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자문해보았는데, 나는 그 답을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 절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는 아이들이나 생각하는 유치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이 너무 느렸던 나는 충분히 성장한 후에야 비로소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보통 아이들보다 그 문제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월터 아이작슨,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이덕환 옮김, (까치, 2007), p.31>


본인이 하고 싶고 관심 가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 일은 계속 잘하게 되지만, 등한시하는 많은 행동들은 남들보다 못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어쩌면 천재는 타고난 것보다는 천재성이 발휘되는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끊이지 않는 재미를 느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여러분들도 여러분 아이들을 천재로 키우고 싶다면 아이가 좋아하는 특정 행동을 찾아 끊임없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해주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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