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막 좋아 보이진 않는데
어렸을 때부터 결혼울렁증이 있었다.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 중 결혼해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한 커플도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지는 전혀 겉으로는 알 수 없어 보였다. 또한 속사정을 듣게 된다거나 해도 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는 확신보다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고, 또 시간이 흘러 결혼했으며 당연히 자녀도 낳고 힘들 때도 있지만 계속 견뎌내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함께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결혼이어야 할 것만 같은데 함께하고 싶지 않아도 결혼을 해버렸기 때문에 끝내 같이 살아야 한다니. 법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다는 것, 않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이 때는 이혼이라던 지 돌싱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전이었다. 관계에 얽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성세대를 접하다 보다 보니 우리 세대엔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론 엄마와 아빠가 저렇게 억지로 살려면 차라리 이혼해서 각자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그 세대에 결정하기는 쉬운 문제는 아니었겠지 짐작이나 해보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삶은 살기 싫었다. 사랑을 하면 함께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보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물론 결혼 뒤 부부가 되어 미성년 자녀라는 공동의 책임이 있으면 그 중대한 임무가 없는 커플보다 헤어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함께 사는 것도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없지 않은가. 서로 함께 있어 불행한 부모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곧 잘 불행 해질 테니.
그렇다고 해서 나 스스로는 비혼주의자입니다. 라고 말할 것 까진 아니었다. 결혼을 꼭 해야 하나라는 질문은 자주 했지만 항상 외로웠고, 항상 사랑에 쉽게 빠졌으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 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러나 그 형식이 결혼이라는 형태여야만 함께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지한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관계로 여생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한국 어르신들은 그러다가 헤어지면 어떻게 하냐, 여자가 동거하면 흠집이 생기는 거다 또는 결혼을 하고 같이 살아야 맞다, 아니면 같이 살고 있으니 이미 결혼을 한 거냐라는 말들을 많이 하셨는데 아마 '동거'라는 개념은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또 네덜란드에 사는 특정한 환경에서는 더욱이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동거라는 것을 시청에 등록하면 공동의 재산도 인정받을 수 있으며 세금을 함께 내고 또 한쪽이 사고로 갑자기 죽으면 장기기증과 같은 서로의 몸에 대한 결정권도 생기도 한다. 그 뒤에 상대방의 연금으로 남은 다른 한 사람을 법적으로 돌봐줄 수 있는 시스템도 잘 구축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인식면에서도 동거 커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결혼신고를 했다.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는 결정을 알리는 감정적인 부분이 조금 더 컸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나의 안전한 기지, 닻이 되어준 이 사람과,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거실에 앉아 각자 할 일만 해도 재미있는 이 관계를 사람들에게서 공식적으로 인정, 자랑 및 축하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말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선택을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자신과 확신도 들었기도 했다. '나 이 사람이랑 사랑이 끝날 때까지 한번 잘 놀아볼게.'라고 공표를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놓고 구태여 '사랑이 끝날 때까지'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오히려 이 사랑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 사람이 사고로든, 병으로든, 건강하게 잘 살다가 죽든 언젠가 사랑은 끝나니까.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주 만약에라도 이 사랑이 식는다면 용기 있게 헤어짐을 할 거라고.
너무 청개구리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이 없으면 삶의 의미는 없다. 사랑의 끝을 생각할 때 오히려 지금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의미가 있다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