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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Nov 18. 2024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어린이집 근처 건물 1층에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다. 클래식한 카키색 철문이 눈길을 끌었다. 그해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고, 둘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네 살 된 막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나면 둘째가 올 때까지 여유 시간이 좀 생겼다. 


어린이집 옆에 있는 노인정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게가 보였다. 위치도 좋고 임대료도 적당해 동네 아이들의 분식점 자리로도 좋겠다며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그곳이 어느 사장님 눈에 띄여 카페로 변신하는 중이었다. 안내판에는 둥그런 아치 가운데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 검은색 기차가 그려져 있었다. 카페 이름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야간급행열차라는 뜻일까?’ 의미가 궁금했지만 카페 이름은 무엇이라도 좋았다. 열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다. 공사 중에도 엄마들 사이에 입소문이 금세 퍼졌다. 

“카페 새로 오픈하는거 알아?”

“거기 사장님이 인테리어 거의 다 하신 거래.”

“로스팅도 한대.”


드디어 카페가 문을 열었다. 가게가 직사각으로 좁고 기다란 구조라 양문을 열면 내부가 훤히 보였다. 입구에는 작은 로스팅 기계가 있고 앞쪽으로 ㅁ자 구조의 바가 놓여있었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꼭 필요한 것들로 채운 듯 했다. 전체적으로 하부는 출입문과 같은 카키톤에 상부는 그레이가 살짝 섞인 화이트톤이었다. 진한 갈색의 마루바닥도 잘 어울렸다. 카페 안쪽에는 4인 테이블이 두 개, 2인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소문대로 인테리어를 본인이 다 완성했다고 했다. 카페 이름과 로고를 디자인해서 메뉴판, 명함 등 작은 소품까지도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안쪽 벽에는 액자 스크린도 설치해 첨밀밀, 중경삼림 같은 영상미 좋은 영화도 틀었다. 카페 곳곳에 멋스러움이 묻어났다. 주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렸다고 했다. 인생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우린 이내 카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단골이 되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 9시 30분, 카페 문여는 시간까지 30분을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인은 밖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보다 못해 준비가 덜 되었어도 괜찮으면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밤사이 조용히 기다렸을 카페에 오픈런을 하는 순간 육아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온 엄마들의 일상도 함께 시작되었다. 


어둑한 조명에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싱그러웠고 테이블은 편안했다. 바를 지나 테이블이 놓인 곳으로 들어서면 아지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카페는 금세 어린이집 엄마들의 커뮤니티 센터가 되었다. 책읽는 소모임도 하고 소소한 인생 얘기도 나누었다.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늘 한잔의 커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그러면 주인은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새로운 커피를 내주었다. 입안에 감도는 고소하고 산뜻한 커피맛이 어둑한 분위기와 함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방금 갈아 갓 내린 핸드드립 커피는 정말 맛이 좋았다. 작은 카페 안에 가득 퍼지는 커피향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주인은 좋은 원두를 선별해 섬세하게 로스팅했다. 원두를 잘 모르는 손님에게 좋은 원두를 추천해주고 맛과 향을 설명해주었다. 부드러운 콜롬비아 수프리모와 산미가 있는 케냐AA나 예가체프 사이에서 고민할 때는 전에 맛이 좋다고 했던 커피가 무엇인지 기억해두었다가 취향에 맞게 권해주었다. 


커피를 잘 모르던 내게 커피를 다루는 주인의 전문적인 실력은 아주 경이로워 보였다. 나는 주인 덕분에 매일 새로운 맛에 눈을 뜨며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카페에 자주 모이던 우리는 모두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원두는 로스팅 단계에 따라 약배전, 중배전, 강배전으로 나누어지고 원두 맛이 결정된다. 약배전일수록 쓴 맛이 덜하고 산미가 강해 과일향이 나는  원두는 약배전으로 볶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약배전으로 볶은 커피가 좋았다. 


주인에게 핸드드립하는 방법을 배웠다. 카페에서 좋은 원두를 판매하고 있으니 핸드드립을 할 수만 있으면 집에서도 즐길 수 있고 밖에서도 향긋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여러번 연습을 하고 나니 내가 내린 핸드드립 커피도 그럭저럭 마시기 괜찮았다.  

잘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는 언제 마셔도 좋았다. 아침에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삶의 에너지가 생겼다. 식사 후에 마시면 입안을 개운하게 하고 속을 편하게 했다. 나른한 오후에 마시는 커피는 다시 기운을 내게 해주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커피를 내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들이를 갈 때는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았다.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게 된 후로는 하루도 마시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커피를 즐겼다.       


카페는 2년쯤 후에 문을 닫았다. 주인은 부인의 요양차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주에 꼭 똑같은 카페를 열 거라고도 했다. 가게에 대한 주인의 애정이 어떠했는지 너무 잘 알기에 내 가게가 문을 닫는 것처럼 아쉬웠다. 전주에 카페를 열면 꼭 소식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몇해가 지나도 카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문을 닫은 가게에는 내부를 수리해서 다른 카페가 생겼다. 그곳의 커피도 맛이 좋은 편이지만 미드나잇 커피와는 특징이 많이 달랐다. 이전 주인은 원두 특성에 따라 맛을 살려 드립커피로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지금의 주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의 원두를 골라 로스팅해서 판매한다. 


요즘 나는 하루 한잔만 커피를 마신다. 두통이 있거나 피로할 때 자주 마시던 습관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카페인을 제한하는 중이다. 몸의 긴장을 풀고 숙면을 취하기 위해 커피는 오전 중에 디카페인으로만 마시기로 했다. 한잔만 마실 수 있으니 가능하면 상태가 좋은 원두를 약배전으로 로스팅한 커피를 마시려고 입소문이 난 로스팅 카페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미드나잇 주인만큼 산미가 있는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맛있게 내려주는 카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카페 이름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알란 파커 감독의 1978년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빠삐용, 쇼생크 탈출과 더불어 대표적인 탈옥 영화이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말이 감옥에서 탈옥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은어라고 한다. 카페 주인에게 확인하진 않았지만 그의 의도가 어려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커피를 사러 갈 때마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떠오른다.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갖는 커피타임이 우리에게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일상에서의 탈주를 잠시나마 누릴 수 있었다. 지금도 커피는 나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이다. 정말 맛있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카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연락해주기 바란다. 그 맛을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jjs017love/9019192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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