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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Nov 11. 2024

양푼과 티포트

이사를 하려고 세간살이를 정리하다 보니 물건 하나하나에도 세월이 묻어있다. 숨어있던 주방 살림을 꺼냈다. 아이들이 커가며 사용이 뜸해진 나들이용 플라스틱 도시락통과 여기저기서 받은 크고 무거운 컵들을 과감히 버렸다. 살짝 금이 갔어도 사용하기 적당해 그냥 쓰던 그릇과도 아쉬운 작별을 했다. 집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사용한 것들이라 가지고 다닌 세월만큼 정이 든 모양이다. 

처음엔 대부분 정리하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져가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렇게 처리할 수 없는 물건들도 많았다. 장식장 안에 있는 그릇들은 사용하지 않아도 버릴 수가 없었다. 또 매일 같이 써서 손에 익숙한 물건들은 모양이 허름해졌어도 버리기 어려웠다. 결국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다 들고 이사를 왔다.     


뽁뽁이에 곱게 싸여온 티포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6인조 찻잔과 설탕을 담을 수 있는 작은 용기 2개 그리고 접시까지 한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쯤 두면 좋을까? 사용 빈도에 따라 주방 수납장에 둘 자리가 결정된다. 잘 사용하지 않으니 손이 닿지 않는 맨 위에 두어야 할지 손이 닿는 두 번째 단에 두고 꺼내 쓸지 망설여졌다. 이어서 도착한 다음 바구니에서 양푼 한 뭉텅이가 나왔다. 제일 작은 것부터 큰 양푼까지 층층이 쌓아놓은 그대로였다. 양푼들 자리는 고민할 것도 없이 전에 두고 사용하던 곳과 같은 곳으로 싱크대 가까운 하단에 바로 자리를 잡았다.      


티포트는 신접살림을 마련할 때 친정어머니께서 특별히 챙겨주신 명품 주방 살림이다. 구성 하나하나에 피터래빗 이야기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 있었다. 장식장 한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두고 아이들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를 주며 19년을 가지고 다녔다. 

신혼 초에 딱 한 번 티포트를 썼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차를 즐기는 법을 모르기도 했지만, 그것을 꺼내 차를 마실 만한 여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 이유였다. 티포트는 그저 장식장 안에서 빛을 내며 가끔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켜주었을 뿐이다. 아이를 돌보다 우연히 눈길이 머무르면 그 모양이 너무 예뻐 토끼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언제가 되어야 저 물건을 사용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 조금 우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사온 집에서는 손이 닿는 둘째 상단에 티포트를 정리했다. 뽁뽁이를 벗기며 가만히 손을 대니 ‘왜 한 번쯤 꺼내서 사용해보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들었다. 예쁘게 살기를 바라며 좋은 물건을 챙겨주셨던 친정어머니의 마음도 떠올랐다. 이제는 온전히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들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주 쓰는 컵을 하단에 두고 그 위에 차세트를 정리하니 컵을 쓸 때마다 티포트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의사로부터 커피를 줄이고 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티포트를 꺼내 따뜻한 물을 받아 말린 국화꽃을 넣어 두니 향기가 그득하다. 드디어 찻잔을 꺼내 향긋한 차를 마셨다. 한모금의 국화차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여유있게 살기를 바랐던 친정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크기가 가장 크고 올록볼록한 스텐 양푼은 신혼 초에 시어머니께서 천 원 주고 샀다고 기뻐하시며 에미 쓰라고 주신 것이었다. 의료기 홍보하는 데서 하루를 보내고 받아오신 물건 여러 개를 함께 주셨다. 30년 된 플라스틱 바가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알뜰한 어머니 성품에 새 물건은 며느리를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양푼은 가볍고 크기가 적당해서 사용하기 좋았다.


올록볼록 양푼은 주방의 1등 공신이다. 온 주방을 털어 가장 열정적으로 일한 주자를 뽑아보라면 단연 1위에 꼽을 정도다. 매일 사용하는 밥그릇과 국그릇들도 뽑힐 수 있겠지만 하나둘 깨지고 버려지며 그렇게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점과 밥과 국을 담는 용도로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양푼에게 순위가 밀린다. 19년째 나의 손에서 종횡무진하는 양푼은 지금도 제 역할을 다하며 주방을 지키고 있다. 

양푼의 활약은 이러하다. 우선 김밥 쌀 때 밥을 비비는데 제격이다. 올록볼록해서 뜨거운 밥이 달라붙지 않고 김밥을 마는 동안 남은 밥을 적당한 온도로 유지 시켜준다. 콩나물밥이나 비빔밥도 양푼 하나면 문제없다. 매일 먹는 과일들은 양푼에 담아 잘 씻은 후에야 식탁에 오르고 밭에서 수확한 먹거리나 채소들도 이곳에 담아 손질을 해서 물에 씻는다. 데쳐야 하는 것들은 양푼에 물을 받아 끓이면 열전도가 빨라 시간을 줄일 수 있고 크기가 커서 많은 양도 한 번에 삶을 수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꺼내 사용하는 이 양푼에는 아이 셋을 키우며 수없이 먹거리를 챙겨온 나의 마음과 노고가 묻어있다.      

금요일 저녁, 올록볼록 양푼에 고추장 양념을 담아 고기를 재우고 상추를 씻어 체에 밭쳤다. 저녁 메뉴는 제육복음이다.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고생한 남편과 매운 것이 필요하다는 고3 딸, 혈기 왕성한 고1 아들과 한창 키가 자라는 초6 막내딸 모두가 만족하는 밥상이다. 늘 사용하는 식기들을 꺼내고 제 용도에 맞게 사용하다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의 노력은 우리 가족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응원이 된다. 새 양푼을 건네던 시어머니께서도 가족을 돌볼 며느리를 응원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잘 먹고 웃는 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요즘에는 양푼에 밥을 비벼 남편이 좋아하는 김밥을 말 때 국화차에서 느끼는 마음의 여유 비슷한 감정이 들곤 한다. 그의 칭찬도 좋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기쁜 마음이 든다. 김밥을 먹고 나서 티포트에 국화를 띄워 차 한잔을 하면 더욱 좋다. 고되고 힘들었던 집안일이 자연스레 삶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양푼과 티포트에는 두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있다. 삶의 노고를 잘 아시는 두 분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두 물건을 선물하셨다. 나는 알뜰히 살아오신 시어머니의 지혜와 가정을 꾸린 딸이 여유를 갖고 예쁘게 살기를 바라는 친정어머니의 마음을 잘 안다. 두 물건은 오래도록 곁에 있으며 서로 다른 마음으로 나를 응원했다. 두 어머니의 응원이 우리 가족을 보살피는 힘이 되었고 살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양푼에 밥을 비비고 티포트에 차를 우리며 평범하지만 편안한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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