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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Sep 14. 2023

잔치요리, 그 잡채

잡채 하나면 풍성한 기념일이 된다

 

 돈 버는 큰딸의 스물다섯번째 생일에 잡채를 했다.

 장을 보러 갔는데 요새 시금치가 '시금금금치'라더니 채소 매대에서는 시금치 묶음이 종적을 감추고 시금치님을 한 팩씩 개별포장 해서 냉장칸에 앉힌 희귀한 광경을 보았다. 예전 시금치 한 단의 3분의1 정도의 양이 6천원이었다.

 6천원이 문제라기보다 시금치가 이렇게 비쌀 때 굳이 살 필요가 없어서 대체품으로 부추를 샀다. 부추는 한 단에 3천원이었다.

 부추잡채라는 것도 있으니까 오늘의 잡채에는 시금치 대신 부추다.


 재료 손질을 하다 보니 우리 집 쇠고기미역국에는 국물보다 고기와 미역이 많은 특이점과 똑같이 잡채에도 당면보다 부재료가 많게 생겼다.

 잡채는 각기 다른 재료의 식감과 풍미를 살리기 위해 따로따로 볶거나 데쳐서 준비한 후에 다 같이 한데 버무려 먹는 독특한 음식이다. 재료들의 색깔과 모양까지 밸런스가 맞아야 해서 손이 여러 번 가기는 한다.  


 

부재료 준비중



 그렇다고 내가 잡채를 잘 만들어서 이걸 하겠다고 나선 것이냐면 그건 아니다. 잡채를 잘 먹는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잡채를 맛있게 하는 엄마는 아니지만 딸의 생일날 잔치음식스러운 잡채를 하고 싶었다. 잡채를 해 보리라 생각하고서는 인터넷에서 각종 요리 선생들의 팁을 찾아 이론적으로 예습했다.

 무엇보다 당면을 딱 알맞게 삶는 게 중요해 보였다. 나는 잡채를 슴슴하게 해서 많이 먹고 싶었다.


 



 결혼 후 시댁의 명절에 참여하면서 친가와 비교해 보니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명절날 잡채의 부재였다. 시어머니는 명절에는 잡채를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결혼 후 처음 맞은 추석에 잡채가 없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친정의 큰어머니는 명절마다 잡채를 아주 넉넉히 하셨다. 큰아버지와 형제들이 태어난 오래된 한옥 부엌에서 큰어머니는 항상 묵묵히 일만 하셨다.  

 어린애가 들어가 반신욕도 할 만큼 커다란 양은 볼에 당면과 재료들을 쏟아 넣고 섞으면서 큰어머니는 손이 뜨겁다고 몇 번을 쉬었다. 나는 막 무친 잡채 한 입을 받아먹으려고 부엌 문틀에 앉아 구경하곤 했다.

 큰어머니는 가난한 집 칠 남매의 성실한 맏며느리였고 그 시절에는 그 역할 자체가 고행길이고 수행길이었다. 그래서 큰어머니는 나나 내 사촌여동생들에게 '장남에게는 시집 가지 마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때 큰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은 다 맛있었다. 우리가 음식을 더 달라고 하면 좋아하시던 큰엄마 표정이 보기 좋아서 더 달라고 했었다.

 

 큰딸 생일에 잡채를 하며 큰어머니의 잡채를 생각하다니 내가 늙는구나 싶다. 당뇨와 다른 지병도 있는 큰어머니는 이제 진짜 할머니가 되었지만 내 사촌 삼남매가 다 잘 살고 엄마에게 잘하니 아마 더 바랄 것 없으신 노년이실 게다.

 


요만큼만 무쳐도 뜨끈뜨끈한 김이 느껴진다


 


 

 큰딸의 생일이 있는 주의 일요일에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잡채는 점심상에 냈다.

 뿌듯하게 만들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좀 싱거웠다. 원체 해 놓은 양도 많아서 잡채가 많이 남았다. 남은 잡채를 하룻밤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날 간을 더 하고 한번 더 볶아서 우리 부부가 다 먹었다.

 점심을 먹고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선물을 주고 큰딸의 생일을 축하했다.

 우리의 첫딸이 스물다섯 살이라니 애들 크는 것만 보이고 나 늙는 것은 안 보인다는 어른들 말씀이 딱이다.

 

 가끔 잡채가 먹고 싶어서 반찬가게나 마트에 가 보면 기름이 반질하고 비싸지 않은 재료와 당면 위주의 잡채가 있는데 그것도 맛있다. 아주 가끔 불어서 맛없는 잡채를 만날 때도 있다. 식감은 떨어져도 간장과 참기름이 만드는 기본적인 향은 남아있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밀키트가 잘 나오는데 잡채도 밀키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한번 찾아봐야 겠다.



큰딸 생일 기념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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