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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19. 2018

너는 백석을 불러왔다.

그날 이후로 백석을 읽는다.

그 겨울밤 종강총회 뒤풀이에서, 나는 거의 끝까지 취해있었다. 물속을 걷는 것처럼 의식은 느리고 버거웠다.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들이 뭉개지고 흩어지다가, 난데없이 와하하하 웃는 소리에 따라 웃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취해버린 걸까. 이제 겨우 밤 11시인데, 이제 겨우 2차인데. 자책을 안주 삼아 물인지 술인지도 모를 것을 홀짝이고 있던 중, 네 목소리를 들었다. 


동기들, 그리고 몇몇 선배들과 건너 테이블에 앉아있던 너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너도 조금 취했던 건지도 모른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 너의 테이블은 겨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키장, 홍합탕, 귀마개, 캔커피, 첫눈, 그렇고 그런 시답잖은 단어들이 테이블 위 안주들처럼 어질러졌다. 나는 뚫어져라 너의 옆모습을, 가끔 의미 없이 끄덕이는 그 고갯짓을, 술기운을 떨쳐보려 내뱉는 한숨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티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안함에 한 잔 하자며 잔에 소주를 따르고, 후배들은 그만 마시라며 나를 말리고, 안 취했다며 허세를 부리고, 그러던 중에도 내 귀는 너의 테이블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나 보다.


네가 있던 테이블에 웬 남자 선배 하나가 살짝 혀가 꼬인 발음으로 너에게 물었다. 겨울,하면 뭐가 생각나느냐고. 너는 정말 취한 듯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턱을 괴더니 음... 하고 고민했다. 그 음... 의 겨우 몇 초가 어찌나 길던지. 아마, 그 몇 초 동안 이 세계에는 수십 만의 눈송이가 내려 앉았을 것만 같앗다. 그러다가 너는 대답했다. "백석이요."


너의 대답에 당황한 듯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술집을 가득 어지럽힌 소음 속에는 문학도, 나타샤도, 시도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분명 그 남자 선배는 백석의 시 한 구절도 읊을 수 없었을 테니까.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을 깨고, 그중 목소리가 크고 리더십이 강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다른 남자 선배가 어색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자, 한 잔 하자" 외쳤다.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너의 짧은 대답은 금세 잊힌 듯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백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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