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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19. 2018

상실의 시대에 만난 사람

미도리에게 사랑을 배웠다

 아름이가 수영구 도서관에서 책 5권을 빌려왔다. 오랜만에 도서관엘 갔더니, 신작이며 읽고 싶었던 책들이 한가득이라 신이 나서 책을 수북이 쌓았다가, 대출은 5권까지라는 사서의 말에 고심해서 골라온 책들이라고 했다. 나보다 다독가인 아름이가 골라온 책들은, 모두 내가 읽어보지 않았으나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들이었고, 그중엔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도 있었다. 


 라디오 다큐 구성안을 작업해야 해서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머리도 식힐 겸 박준 시인의 산문집을 들어, 대충 중간쯤을 펼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관한 글이 나왔다. 덕분에 박준 시인을 잘 모르는데도, 왠지 그가 살갑게 느껴졌다. 내 방에는 약 15년쯤 된 ‘상실의 시대’가 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누렇게 변색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0번쯤 읽으며 밑줄을 그어둔, 상실의 시대 한 권. 산문집 속에서 박준 시인이 당시 도시의 유일한 서점에서, 장기 대여하려다 얼떨결에 사게 된 그 중고 상실의 시대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밑줄은 내가 가진 상실의 시대 속 밑줄과 같았다.


 장남이면서, 친구나 선배한테 연애 이야기를 먼저 하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성격도 아니어서, 나는 연애나 사랑을 몸소 겪으며 배워왔다. 말이 좋아서 ‘몸소 겪으며’지, 사실 지난 인연들에게 무수한 상처를 남기며 내 몫을 챙겨 온 셈이다. 그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 연애란,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이래야 하는 거구나.’ 하고 배웠던 것이 바로 상실의 시대 속 문장이었다. 


 “아니, 내가 아무리 내가 욕심쟁이라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 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상실의 시대」 129쪽


 제 삶의 슬픔을 특유의 통통 튀는 성격으로 감추는 미도리가 사랑을 ‘합리’로 이해하려는 와타나베에게 하는 얘기. 이웃집에 불이 난 상황에,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치고,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부르던 미도리가 문득 자기 가정사를 얘기하다 하는 얘기. 고등학생이던 나는 이 대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사랑이란 것이 그런 불가해한 것이라는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아름이가 무려 9년 전의 추억을 떠올렸다. 김해나 부산에서 데이트를 할 때, 무슨 이유에선지 아름이는 먹고 싶은 메뉴를 정할 때 변덕이 심했다. 찜닭을 먹자고 해서 한참 걷다가, 갑자기 밀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거나, 다시 밀면 가게로 향하던 길에 돼지국밥을 먹으러 가는 게 좋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변덕에 자기가 민망해진 아름이가 나한테 변덕이 심해 미안하다고 얘길 했는데 -아름이 표현으로는- 그때 내가 굉장히 차분하게 아름이의 두 어깨를 잡고 미도리의 대사를 읊었다는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있는데, 내가 좋아해서 여러 번 읽은 책인데, 거기에 보면 미도리라는 여자애가 이런 얘길 한다면서... 딸기 쇼트 케이크 얘기를 했다는 거다. 당연히 상실의 시대를 읽어보지 않았던 아름이는 이게 갑자기 뭔 소리인가 했겠지만, 당시 내 말의 요지는 “그러니까, 그런 변덕 부리는 건, 나는 괜찮아.”였다는 거다. 


 나에 대한 기억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일은 쑥스럽다. 특히 그 기억이 내게는 이미 잊힌 것이라면 더욱. 아름이 얘길 듣는데, 스물의 나는 왜 그렇게까지 장황하게 괜찮다는 말을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가 너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아름이가 너무 좋았던 걸까. 어느 쪽이든, 좋아서 그랬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던 내게, 스물은 ‘상실의 시대’를 읽고 그 쓸쓸함만 잔뜩 골라 품에 안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내 이십 대가 온통 상실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 내 모든 상실을 막아준 사람이 아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모든 상실도 후회스럽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아름이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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