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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Mar 02. 2018

내 인생의 '러너스 하이'

오직 달리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러닝, 동적 명상


 러닝만큼 단순한 운동도 보기 드물다. ‘올바른 러닝 방법’ 같은 매뉴얼도 있기야 하지만, 좌우지간 일단 달리면 되는 운동이니까. 아주 비싸진 않더라도 가볍고 쿠션 좋은 운동화를 신고, 불편하지 않은 옷을 입고, 골목이든 해변이든 일단 달리기만 하면, 우리는 ‘러닝’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


 적당히 달릴 때, 우리는 우리 몸 밖의 것들을 관찰하고 즐길 수도 있다. 트레드밀에서는 전면에 있는 TV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광안리 해변 산책로를 달릴 때에는 크고 작은 강아지들과 일렁이는 바다 위 부서지는 물비늘, 붉게 타는 노을을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20분쯤,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꼭 ‘러너스 하이’ 같은 거창한 경지에 이르지 않더라도– 더 이상 몸 밖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호흡을 하고, 발을 구르고, 종아리나 허벅지에 가해지는 부하를 느끼고, 땀이 흐르고 - 단지 그뿐이다. 그즈음해선 러닝도 일종의 동적인 명상 활동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러닝을 하다 보면 몰아쉬는 숨과 대조적으로 마음은 편안해진다.


트레드밀, 제자리라는 불안함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아니면 개인적으로는 로드 러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오르막이나 내리막, 계단, 비포장도로나 보도 블록 등등 다양한 지면을 달릴 수 있고, 야외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아서. 실내 트레드밀도 그 나름의 매력은 있다. 일단 쾌적하고,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안전하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시간이나 거리 같은 것들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운동’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좋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트레드밀 러닝이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곤 했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라는 사실은 다행스러움과 갑갑함의 경계에서 개운치 못한 느낌을 준다. 뒤로 감겨가는 벨트 위에서 제자리를 지켰다는 다행스러움, 그렇게 열심히 달렸는데도 여전히 제자리라는 갑갑함. 그건 어쩌면, 애쓴다고 애쓰며 열심히 살았는데도 딱히 달라진 것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생긴 신경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로 

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들도
열렬히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빠르게 뒤로 감겨 가는 생의 컨베이어 벨트
그대는 그대의 좌절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희망을 심으며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다 괜찮다

                                                                                                    – 김경빈 「다시, 다 時」 中

 특히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때, 헬스장 갈 돈은커녕 밥값 몇 천 원도 악착같이 아껴야 했던 때,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로드 러닝뿐이었던 때, 그래서 이런 시를 썼던 건지도 모른다.
위로받고 싶어서, 위로하고 싶어서.


로드 러닝, 떠난 만큼 돌아오는 일


 그래도 지금은 삼시세끼 걱정 없고, 현금 할인받아 몇 달치 헬스장 끊어 운동할 정도의 생계를 겨우 꾸려나가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은 나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러닝은 로드 러닝을 선호한다.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예의, 뭐 그런 건 아니고 정말 로드 러닝이 좋아서다. 상쾌하고 뿌듯하다.

 무엇보다, 트레드밀의 ‘제자리걸음’과 비교했을 때, 로드 러닝은 훨씬 우리네 삶과 닮아있다. 로드 러닝은 어디든 달릴 만큼 달린 뒤에는 반드시 그렇게 떠난 만큼 다시 돌아와야 한다. 노력한 만큼 전진하고, 결과만큼 책임진다. 삶의 종점에서 지난 삶의 행적을 돌이켜보는 것처럼, 쌓아온 업이 죽고 나서도 횡횡한 소문으로 도는 것처럼, 로드 러닝은 꼭 그만큼의 책임을 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내 인생의 로드 러닝, 내 인생의 러너스 하이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달리는 로드 러닝처럼 때로는 실패를 염두에 두고 도전하는 신중함이 필요할 때도 있고,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미친 듯 내달리고 보는 로드 러닝처럼 생의 전부를 내던지는 무모한 도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여태 나는 신중하기만 했다. 어느 날엔 나도 모르는 어느 동네, 어느 골목까지 단지 ‘달리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돌아올 일은 모두 잊고, 그렇게 미친 듯 내달리는 때도 오겠지. 내 인생에도 그런 열정의 순간이, ‘러너스 하이’의 순간이 찾아오겠지. 그렇게 떠나버린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서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

 로드 러닝을 하는 동안, 요즘의 나는 이런 상상들을 한다.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http://8f.kantukan.co.kr/?p=6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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